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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우리, 우주 #5 (완)

어떡하지. 구리야, 우리 어떡해.

by 해란

다섯 정거장이나 지나치고 말았다.


그림자가 발밑에 붙다시피 하는 시간. 태양 빛이 따갑다. 빈속에 애먼 말만 꼴깍꼴깍 삼켜댄 탓인지 현관문을 나섰을 때보다 속이 더 쓰리다. 술을 마시지 말걸. 어제 괜히 우주랑 마주쳐서는,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여섯 캔들이 맥주를 사다가 몽땅 마셨다. 냉장고 구석에 있던 언제 마시다 남겨둔 건지 모를 소주도 입속으로 탈탈 털어 넣었지. 세상에 자전축이라니…… 그따위 얘기만 아니었어도…….


바로 맞은편에는 정거장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야 할 텐데. 건너가서 좀 걷다 보면 나오려나. 좌우를 확인하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발을 내디뎠다. 천천히 걷다가, 코너를 돌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승용차가 보여서 종종걸음을 쳤다.

어,

어어,


뛰어!


가슴이 쿵쿵 뛰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엉거주춤 무릎을 짚고 서서 이미 멀어진 승용차의 뒤꽁무니를 노려본다. 숨을 고르며 몸을 똑바로 세우는데 휘청, 몸이 오른쪽으로 기운다.


참 나, 이걸 신고도 용케 뛰었네.


구두 탓에 걸을 때마다 몸이 기우뚱거린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건만 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후터분한 공기. 벗어 들고 있던 재킷을 반대편 팔에 건다. 얇은 스커트 안감이 허벅지에 들러붙는다. 지겨운 여름. 가을은 어디쯤 왔나. 지구가 더 기울거나 덜 기울어 돌면 예년보다 빨리 오려나. 망할 자전축 같으니.


그나저나 정거장이 왜 이리 안 나올까. 사이가 이렇게 멀었나. 이만큼이나 지나칠 동안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무엇… 무엇을……

덥다……

머리가 빙…… 도는 것 같은데……

이대로 버스를 타면…… 냄새… 쿰쿰한…… 승객들의 시선…… 무엇을 선택하든 무엇인가는 견뎌야 할 테지…… 나는 그냥…… 그냥… 숨이 쉬어지는 대로 쉬고 싶을 뿐인데…… 그게… 그게 뭐라고……

어… 어…… 머리가……

눈앞이……


컹!


깜짝이야.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분명 개 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구리는 혼자 괜찮을까.

어떡하지.

구리야, 우리 어떡해.

언니가 방금 면접을 망치고 터덜터덜 돌아가고 있단다.

이제 어쩌면 좋니.


내 결정에 따라 앞으로의 삶이 결정될 텐데.


무엇이 옳은 선택일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쭉 함께 살아나가려면 서로를 위해 감내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겠니. 모든 선택지를 취하거나 피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무엇인가 선택해야만 한다.


선택의 결과는 너의 괴로움일 수도 나의 괴로움일 수도 있겠지. 우리가 앞으로 더 능란하게 현실을 견디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수술, 교배, 이유, 설명, 합리화, 납득…… 아니다. 그보다는 가만히 다가와 축축한 코를 내미는 너의 체온, 네가 낯설어도 네 밥그릇을 채우는 알량한 손, 너 때문에 고민스럽다고 해서 너를 저버리지 않는…… 그럴 수 없는 우리.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으니까. 현실적으로 네가 내게 속해 있다고 해서, 네가 나의 소유는 아니니까.


알겠니.

네가 속한 것이 너를 지배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돼.

그러면 바깥이 너를 휘두르고…… 휘둘리고…… 그러나 네 자궁은 네 것이지. 어디까지나 네 것이지. 그것이 쓸모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걸 네가 아닌 누가 정한단 말이야. 네가 새끼를 낳거나 낳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 늙어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너를 쏙 빼고 돌아간다. 그건 돈이 돌고 떡이 도는 세상의 이야기. 미래의 질병 혹은 미래의 생명에 들어갈 비용이 너를 압도한다. 내가 어떻게든, 오직 너만을 생각하여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것은 적합한 선택일까? 내가 고려한 고통이 네가 느낄 고통과 결코 같지 않다는 측면에서 내 선택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텐데.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걸음이 기운다. 발이 아프다. 요행히 넘어지지 않더라도 풀썩 주저앉을 판이다. 어떻게 걸어야 하나. 같이 기울면 넘어질 테고, 똑바로 서면 자꾸 아픈데. 차라리 맨발로 걸을까. 하지만 어제 우주가 그랬지. 세상은 이미 기울어 있다고. 축이, 지구가 이미……


그러나 물러나서 바라보면 지구도 일개 행성이지 않나. 우주에서 보면 지구도…… 우주 속에서 기운 채 움직이는 하나의 점… 점들…… 우주…… 우주도 돌까…… 돈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돌까. 기울어 있을까, 그것도? 몰라,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주의 기준은 우주 안에 있겠지. 지구도, 축도 모두 우주 안에 존재하니까.


휭 바람이 분다. 좀 전에 내린 버스와 동일한 번호를 단 버스가 곁을 지나쳐간다. 저기, 몇 걸음 앞에 드디어 정거장이 보인다.


버스를 한 대 놓친 끝에 겨우 버스에 올랐다. 빈자리에 앉으니 머리 위에서 에어컨 바람이 쏟아진다. 정수리를 달구던 열기가 빠르게 식는다. 쿰쿰한 냄새가 에어컨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밀려든다. 흔들리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던 터라 열기가 빠져나간 자리로 금세 한기가 밀려든다. 내내 팔에 걸어 두었던 여름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눈을 감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숨을 조금 들이마시고 느리게 내뱉는다. 덜컹덜컹 달리는 버스는 춥고 갑갑하다. 식은땀이 난다.


삐—


하차벨이 울리고 버스의 흔들림이 멎는다. 누군가 내리고 누군가 올라타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이고 시상에. 이 아가씨 좀 봐야.


괄괄한 목소리. 설핏 눈을 뜨니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주름진 얼굴이 보인다.


이보소, 기사양반 여그 에어컨 좀 꺼주소. 뭔 에어컨을 요로코롬 씨게 틀어싸.


아유, 그러면 다른 승객분들이 더워서.


그려? 이 동네 양반덜은 더위를 겁나게 타는가 봐? 그람 자암깐만 껐다가 이따 다시 키믄 안 돼야? 이?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앉기는 무신, 돼얐어. 시방 얼굴이 얼매나 허연지 알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두툼하고 따스한 손바닥이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토닥토닥 두들긴다. 그리고는 내 옆의 창문을 조금 연다.


따순 바람 쐬면 좀 나을 것잉게.


위잉 돌아가던 에어컨 소리가 멈춘다. 뒷자리에서 불쑥 인기척이 나더니 청년 하나가 말없이 일어나 뚜벅뚜벅 뒤쪽으로 걸어간다. 할머니가 함빡 웃으며 그 자리에 털썩 앉는다. 뒤를 돌아보니 이어폰을 낀 청년은 어느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


손바닥만큼 열린 창틈으로 후끈한 여름 공기가 미지근한 바람이 되어 들어온다.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포갠다. 그날 우주가 잠에서 깨어나 그랬던 것처럼. 차창 밖으로 아까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들이 되돌아온다. 유리창에 눈동자가 비친다. 눈동자 위로 구리의 까맣고 동그란 코가 포개진다. 축축한 코가 반짝 빛난다. 대체 언제까지 그럴래.


주먹을 말아 쥔다.

말아 쥔 주먹 속에서 꾹, 엄지손톱이 눌린다.





"우리, 우주"는 이것으로 완결입니다.

늘 그렇듯이, 함께 읽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리고 아쉽지만 다음 주 <행간 새김>은 개인 사정으로 한 주 휴재합니다.

잘 마무리하고 올해의 마지막 주에 새로운 소설로 돌아올게요!


요즈음 부쩍 날이 추워졌는데 모쪼록 보드랍고 따뜻한 연말 보내셔요 :)



*<우리, 우주>에 쓰인 상단 이미지는 직접 찍은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