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지구잖아
겨우 버스에 올랐다. 빈자리에 앉아 흔들리는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머리 위에서 에어컨 바람이 쏟아진다. 정수리의 열기가 빠르게 식는다. 쿰쿰한 냄새가 에어컨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밀려든다.
축축한 묵은내.
겨우내 죽어 있다 봄을 견디고서야 위잉 내뱉는 날숨에 서린 곰팡내.
창문을 좀 열까. 환기해도 될까. 에어컨이 풀가동 중인 버스에서 창문을 여는 일은 어쩐지 망설여진다. 에어컨을 꺼달라는 요구도 마찬가지다. 그건 버스기사를 포함하여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의 눈초리를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슬며시 주변을 둘러본다. 무표정한 얼굴들. 다들 아무렇지 않나. 숨 쉬기 불편하지 않나. 숨을 조금 들이마시고 느리게 내뱉는다.
내가…… 예민한 건가.
눈을 내리까니 스타킹을 뒤집어쓴 무릎이 햇빛을 받아 자글자글 빛난다. 그 너머로 가지런히 붙은 구두코가 보인다. 굽, 결국 못 갈았지. 굽이 안쪽부터, 그것도 오른발이 유독 심하게 닳는 이유는 역시 내 자세가 불균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주…… 우주는 아니라고 말했다. 내 탓이 아니라는 논리를 뒷받침한다는 근거가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어제, 동물병원 앞에서 우주와 마주치는 바람에 그대로 함께 구리의 진찰을 받았다. 진찰을 받은 뒤에는 구리를 이동장에 넣어 동물병원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캔 커피를 사들고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 마주 앉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떡할 거야.
뭘.
우주가 턱 끝으로 구리가 담긴 이동장을 가리켰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애꿎은 바닥만 발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 걔도 그러네.
뭐가.
신발 말이야. 밑창이 안쪽으로 닳았어.
아무래도 자세 때문인 것 같아. 내 탓이지 뭐. 비뚤게 걷나 봐.
에이, 자세 때문이라고 해도 그게 왜 네 탓이야.
그럼 누구 탓인데.
자전축.
뭐?
어처구니없어하는 내 표정에 아랑곳없이 우주는 짐짓 심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돌잖아.
그게 뭐가 문젠데.
문제는 그 축이 기울어 있다는 거야. 우리, 너 자전축이 몇 도나 기울어 있는 줄 알아?
이십 몇 도? 몰라. 학교 다닐 때나 외웠지.
이십삼 점 오. 이십삼 점 오 도야. 공전 궤도에 대해 이십삼 점 오 도 기운 채로 자전하면서 또 해마다 태양 주위를 빙그르르 돌지. 그렇다 보니까 지구에 햇빛이 똑바로 비치기도 하고, 비스듬히 비치기도 하고…… 계절이 변하고…… 싹 돋고, 꽃 피고, 잎 지고…… 만약 자전축이 똑바로 서 있다면 일 년 내내 기온도 계절도 안 변할 텐데. 그치? 그런데 요게 아주 절묘하게…….
오케이, 거기까지.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거랑 내 신발이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여기 지구잖아. 지금 우리 있는 데가 지군데, 그게 돈대도? 세상이 기운 채로 돌고 있다고. 결국 그 탓이라는 거야, 신발도. 그렇잖아. 여기서 걷는데 밑창이 안 닳고 배기겠냐구. 사실 생각해 봄 당연하지. 기운 방향으로 같이 기울면 넘어질 테니까, 버티며 걸으려다 보니 닳을 수밖에. 똑바로 중심을 잡고 걸으려고 할수록 더 많이 닳겠지. 뭐 어떡하겠어. 세상이 기울어 있는데. 더구나 넌 중심을 잡을 때 오른발을 주로 쓰니까…….
하지만 우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잖아. 그런 걸 안다고 닳던 신발이 안 닳아? 아님 어디서 돈이 나오기를 해, 떡이 나오기를 해.
내 말을 들은 우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용? 쓸모?
드르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뒤로 밀려난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벌렁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우리, 돈도 떡도 너도 이 행성 안에서 돌고 있다고. 소용, 쓸모. 그래 좋아. 그럼 너한테는 뭐가 쓸모 있어? 너의 쓸모는 뭐지? 네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쓸모없을 수 있어. 네가 버린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간절할 수도 있다고.
우주는 연신 어깨를 씩씩 들먹였다.
우리, 넌 여기 살면서 여기에 대해 몇 번이나 생각해 봤어? 우린 이미 여기가 너무 당연하단 말이야. 당연해서 모른단 말이야. 생각하지 않으면,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세상…… 눈치나 보면서…….
크게 들먹이던 어깨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럴래.
그 말을 끝으로 우주는 파라솔 아래를 벗어났다. 성큼성큼 몇 걸음 가다가 휙 뒤돌아 소리쳤다.
앞으론 네 손톱 누를 일 없겠다!
멀거니 앉아 있는 나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너, 놓쳤어.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다.
어라, 여기가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