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냐 나 지금 터미널이다
시야가 희뜩했다. 여자는 몽롱함을 떨치려 눈을 깜박인다. 점차 초점이 또렷해지며 모로 누운 여자의 코앞에 퍼질러 앉은 허연 물체가 정체를 드러낸다.
“일어났냐?”
기척을 알아채고 묻는 목소리에 여자가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내가 몇 번을 말해. 아무리 집이라지만 팬티 정도는 입으라고. 춥지도 않아?”
“망할 년. 제 어미한테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세상천지 어딜 가도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누가 강씨 집안 딸 아니랄까 봐.”
어미는 궁둥이 한 짝 꿈쩍하지 않고 불퉁스레 잔소리를 퍼붓는다.
“삼십 줄 들어선 지가 언젠데, 응? 여태 남자도 없이 궁상떠는 년을,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년이랍시고 기껏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왔더니만 아주 그냥 눈 뜨자마자 상전 노릇이야. 근데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이제야 일어나? 해가 벌써 중천이다, 요것아.”
중천이든 반천이든 팬티나 좀 입으시라고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여자는 가까스로 삼켰다. 여기서 기를 쓰고 대거리해 봐야 괜히 잔소리만 더 길어질 게 뻔했다. 여자는 어미를 모르지 않았다. 알량한 그림 실력으로 어찌어찌 제 한 입에 풀칠 정도는 하게 되었을 때 여자가 결연히 집을 나온 이유도 그 연장선상에 있지 않았나. 여자는 조건이 허락하는 선에서 본가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월세를 구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느꼈던 황홀경이 여자의 뇌중에서 아스라이 명멸했다. 그러나 달콤한 시간은 왜 언제나 짧게 그치는지. 거처를 옮기고 달포가량 지났을까. 여자가 막 붓에 물감을 묻혀 들어 올린 순간 책상 모서리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디냐 나 지금 터미널이다
어미였다.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불쑥 올라와서는 대뜸 데리러 나오라니. 붓꼬리에 매달린 쪽빛 물방울이 툭, 떨어져 도화지 속 소녀의 뒤꿈치가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여자는 입을 앙다물고 팔레트 위에 붓을 내려놓았다. 터미널로 가는 내내 부아가 났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서야 터미널에 도착한 여자를 먼저 알아본 어미가 발치에 놓인 짐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보퉁이를 그러안고 뒤뚱뒤뚱 다가오는 어미의 표정에는 아직 제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 미아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 표정에 굴복당해 첫발을 허용한 것이 실수였다. 이후 어미는 매번 예고 없이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여자가 부재중이면 다짜고짜 휴대전화로 연락을 넣은 뒤 골목 어귀 슈퍼마켓 평상에 앉아 여자를 기다렸다. 그래 놓고는 허둥지둥 돌아온 여자가 무어라 한마디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방구석에 처박혀 그림이나 그리는 년이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나며 퉁바리를 놓았다.
여자에게 잔소리를 퍼붓느라 잠시 멈추었던 어미의 팔이 다시 움직인다. 움직이는 각도며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이라인을 그리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여전히 누운 채로 눈동자만 굴려 어미의 뒤태를 훑었다. 역시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살이 불었다.
“일어났으면 별 시답잖은 소리 작작하고 씻기나 해.”
여자가 눈을 꾹 감는다. 하나, 둘, 셋. 심호흡을 하고 벌떡 일어난다. 욕실로 들어가 잽싸게 문을 닫으려는데 어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아, 그 대야에 있던 팬티 내가 빨아 널었다. 넌 나이가 몇인데 여태 그걸 흘리고 다녀?”
쾅. 문을 닫고 샤워기 수도꼭지를 비트는 여자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진다.
“나는 아무래도 밥 시켜야겠다. 너도 시킬래?”
“아냐, 난 됐어. 괜찮아.”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흔드는 찬미 앞으로 술병이 놓였다.
여자가 공깃밥 하나를 추가하는 사이 잔에 술을 채운 찬미가 곧장 술잔을 부딪쳐왔다. 그대로 쭉 들이켜는 기세에 여자도 덩달아 술을 입에 댔다. 소주가 유난히 썼다. 여자는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첫잔을 들고 머뭇대다가 점원이 뒤늦게 내온 물병을 받아들며 얼른 잔을 내려놓았다. 기본 안주와 냄비를 실은 가스버너가 잇달아 나오고 퍽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튀었다. 미리 끓여 나온 뻘건 부대찌개가 금세 보글보글 소리를 냈다.
건너편에 앉아 냄비를 주시하는 찬미는 여자가 기억하는 찬미와 사뭇 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탓도 있겠으나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을 만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랄까. 눈썹을 가리는 풍성한 앞머리며 깊어진 쌍꺼풀은 말할 것도 없고 딱 달라붙는 원피스 위로 부각되는 몸태가 여자의 기억 속 실루엣보다 훨씬 가냘팠다. 교문을 지나는 여자를 보고 찬미 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해오지 않았다면 아마 여자는 찬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터였다.
“너는 진짜 머리만 길었지 대학 다닐 때랑 똑같다, 야.”
“똑같기는, 이제 나이가 몇인데. 그때보다 살도 좀 쪘구.”
“그래? 난 통 모르겠네. 지금도 순 말랐는데 뭘.”
금세 공깃밥이 나왔다. 밥뚜껑을 연 여자가 냉큼 손가락을 귓불로 가져간다.
“너 정말 안 먹어도 돼?”
“응. 그나저나 학교엔 어쩐 일이야?”
“이래저래 서류 뗄 게 좀 있어서. 넌?”
“난 일하러. 요즘 우리 학과 조교로 있거든.”
대화 간간이 밥과 찌개를 얹은 숟갈이 여자의 입을 드나들었다. 반면 찬미는 안주는커녕 제 앞에 놓인 수저조차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소주와 물만 들이켰다. 그런 모습이 여자는 생경했다. 여자가 기억하는 찬미는 간식을 먹었든 저녁을 먹었든 안주가 나오면 부리나케 젓가락을 가져가던 친구였다. 발그스름한 뺨을 하고 소리 나지 않게 음식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 보고 있노라면 절로 푸근한 미소가 지어지는. 근원 모를 서글픔이 발끝으로 밀려들어 여자의 발가락이 움찔 오그라들었다. 찬미는 잔을 비우는 족족 도로 채웠다. 술 앞에서는 성미가 급해서 누가 따라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작하는 버릇은 여전한 듯했다. 여자는 어느 결에 대화가 중단된 줄도 모르고 느릿느릿 밥술을 떴다. 텔레비전에 홀린 꼬마처럼 예전의 찬미와 눈앞의 찬미를 비교하느라 정신이 팔려버린 것이다.
밥알을 기계적으로 씹으며 상념에 잠겨 있던 여자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정적에 휩싸인 테이블 맞은편에서 찬미가 여자의 밥그릇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여자의 입가에 머쓱한 미소를 걸렸다.
“내가 너무 밥만 먹었지. 오늘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어서.”
여자의 목소리에 난처함이 묻어났다. 집요하게 밥그릇을 쳐다보던 시선이 파뜩 정면을 향했다.
“어이구, 너도 참 별 소릴 다. 근데 넌 진짜 신기하다. 그렇게 먹는데도 어쩜 그리 말랐니? 대학 때도 그랬지. 나랑 붙어 다니면서 같이 먹어도 너는 말랐는데 나만 투실투실해가지고는, 꼭 내가 네 몫까지 다 뺏어먹는 것처럼. 역시 체질이 다른가 봐. 가만 봄 뭘 어떻게 먹어도 살 안 찌는 애들 있잖아. 내가 볼 땐 네가 딱 그 짝이야. 한마디로 축복받은 체질! 아, 진짜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