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행간 새김

보리차가 끓고 나면 #2

먹고 싶음 쳐다만 보지 말고 먹어

by 해란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잠옷과 속옷을 벗어 대야에 담은 뒤 수도꼭지를 살짝 잠가 졸졸거리는 샤워기를 옷 사이에 묻었다. 세면대 앞으로 가니 거울에 비친 반 토막짜리 여자가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콧마루와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눈이 우묵한 얼굴. 유두만 톡 튀어나온 판판한 가슴과 살가죽에 갈빗대가 겨우 감춰지는 몸. 여자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배꼽 주변을 어루만진다. 고둥이 갯벌을 지나듯 살이 튼 자국을 따라 과거의 낙인을 더듬거린다.


거울 아래쪽부터 부옇게 김이 서린다. 희뿌연 수증기 속으로 여자의 배꼽이 사라졌다. 허리가 사라졌다. 가슴이, 쇄골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발바닥이 뜨거워졌다. 대야에서 흘러넘친 물이 욕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여자는 급히 찬물을 틀고 물살에 밀려 대야 밖으로 팔을 뻗는 잠옷을 지르밟았다. 소맷자락을 밟힌 옷소매가 물과 공기를 토해내지 못해 통통하게 부풀었다. 여자는 소스라치며 발을 뗐다.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소매가 푹 꺼져 욕실 바닥에 들러붙었다. 타일 바닥의 요철이 쫄딱 젖은 비렁뱅이의 육신처럼 얇은 옷감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등신.”


욕지거리를 낮게 내뱉으며 여자가 쪼그리고 앉는다.


“머저리, 얼간이, 쪼오오다.”


삐져나온 잠옷을 원래대로 대야에 욱여넣는 여자의 코끝에 불현듯 비린내가 스쳤다.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핏물과 낟알만 한 피멍울이 물살에 휘말려 수챗구멍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부정출혈일 수도 있고, 월경이 다시 시작됐을 수도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기는 합니다. 지금도 저체중이긴 하지만 예전보다는 양호하잖아요. 자궁 상태도 괜찮고. 좀 더 지켜봅시다.


지난달 산부인과를 찾은 여자에게 주치의가 했던 말이다. 오늘로 넉 달째, 주기가 다소 불규칙적이기는 해도 다달이 사나흘씩 피가 비치는 꼴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월경이 맞는 듯했다. 여자는 과연 의사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싶으면서도 한편 의아했다. 초경을 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딱 멎었던 생리 현상이 아닌가. 그것이 서른 넘어 다시 시작되다니. 마지막으로 한 게 정확히 언제였더라. 여자는 까마득한 과거를 회상하며 수도꼭지를 다시 온수 쪽으로 돌렸다.






느닷없이 뜻밖의 말을 우르르 쏟아내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여자는 당혹했다.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객쩍이 숟가락을 들었다. 깨작깨작 밥을 뜨고, 입에 넣고, 턱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여자의 동작이 바뀔 때마다 찬미의 시선이 졸졸 따라붙었다. 밥알을 씹으면 씹을수록 혀가 껄끄러워 여자는 도저히 그것을 삼킬 수가 없었다. 정작 찬미 본인은 제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찬미가 소주를 또 한 잔 들이켰다. 소주병이 벌써 반 넘게 비었다.


“안주도 좀 먹어가면서 마셔. 너 주당인 거야 알지만 그러다 속 버려.”


찌개 국물을 밀어 넣어 간신히 밥을 삼킨 여자가 말했다. 눙치듯 말할 작정이었는데 울컥 짜증스런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일순 찬미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찬미는 곧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


“노 땡큐! 안주는 사절이야. 나, 지금 다이어트 중이거든.”


무언가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사람처럼 찬미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너도 알지? 나 예전엔 안 이랬던 거.”


여자는 저도 모르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디마디 뼈가 솟아올라 나뭇가지 같은 찬미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폭이 넓은 티타늄 반지가 몹시 무거워 보였다. 가슴과 엉덩이에 어느 정도 볼륨이 있어서 첫눈엔 그냥 날씬해졌구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몸통이 바람 빠진 풍선만치 홀쭉했다.


“항상 신경 써야 돼. 이 술도 너 만난 기념으로 진짜 오랜만에 마시는 거야. 아직 다 뺀 것도 아닌데 아차 하다 요요 오면 어떡해.”


숟가락으로 찌개를 뜨던 여자의 손이 멈칫했다.


“야, 너도 그만 빼라는 소리 하려는 거지.”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찬미가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여자는 열없이 웃었다.


“그나저나 앞머리는 언제 잘랐어?”

“왜?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넌 이마가 예쁘잖아. 다른 애들도 넌 이마 내놓는 게 훨씬 낫다고 그랬었는데.”

“그랬나. 그냥 이제 나이가 나이다 보니까, 앞머리 있는 편이 어려 보이는 것 같아서.”


찬미가 심드렁하게 앞머리 끝을 매만졌다. 여자의 머릿속에 그래도 내가 이마 하나만큼은 연예인 저리 가라잖아, 말하며 미소 짓는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해쭉 웃으면 광대 위로 볼록하게 솟는 복숭앗빛 뺨과 천진스레 휘어지는 유순한 눈매, 둥그스름한 턱. 기억 속 찬미와 눈앞의 찬미가 과연 동일인이기는 한 걸까. 여자는 여태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미적미적 내려놓고 밥뚜껑을 덮었다. 숟가락과 함께 찬미의 눈길도 테이블 위로 똑 떨어졌다.


“그만 먹게?”

“어?”

“아직 반 공기도 안 먹었잖아.”

“아, 으응. 오늘은 금방 배가 부르네.”

“그럼 그걸 다 남기려고? 세상에나 아까워라. 너도 참, 겨우 몇 숟갈 뜨고 남길 거면 애초에 시키지를 말지.”


찬미가 다급히 소주잔을 들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아까우면 네가 먹든가.”


가시 돋은 목소리가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여자는 방금 덮은 밥뚜껑을 도로 열었다. 그리곤 밥그릇을 집어 찬미 앞에 내려놓았다.


“자. 먹고 싶음 쳐다만 보지 말고 먹어. 혹시 내가 오해한 거면 미안한데, 아까부터 너, 계속 내 밥숟갈만 쳐다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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