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신들린 년. 네가 도둑개야?
여자가 쪼그려 앉은 채 샤워기를 항문 위쪽으로 가져간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엉덩이를 타고 고샅으로 흘러내렸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 뜨끈한 물이 섞여 들자 검붉은 핏물이 물발에 씻겨 내려가며 차차 엷은 빛을 띠다가 끝내 무색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뒷물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피멍울이며 핏물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여자가 빨래를 하는 동안에는 흐르지 않을 터. 여자는 물을 끄고 샤워기를 바닥에 누였다. 푹 젖은 팬티와 잠옷을 바닥에 펼쳐 보니 역시나 핏자국이 선명했다. 옆으로 누워 자는 버릇 탓이다. 오래도록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버릇이 피가 비치기 시작하고부터는 자고 일어났다 하면 사고를 쳤다.
색깔 빨래와 함께 세탁하는 바람에 파란 얼룩이 든 팬티는 어차피 버릴 생각이었다. 여자는 팬티를 쓰레기통에 넣고 빨랫비누를 들어 잠옷을 벅벅 문질렀다. 얼룩을 비비다 말고 여자의 입에서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또다. 핏물을 지우겠답시고 빨랫감을 담그면서 뜨거운 물을 들이부었다. 이래서야 얼룩을 빼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여자는 저 자신한테 기가 막혔다.
“핏자국을 지울 때는 찬물이지, 찬물. 생리도 피다, 피. 피, 피, 피이.”
혼잣말을 구시렁거리며 빨랫감을 문대는 여자의 손놀림이 우악스럽다. 비누질을 끝내고 옷을 헹구려는데 언뜻 무슨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반찬통 뚜껑이 여닫히고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어미다. 여자가 씻는 틈을 타 홀가분히 진지를 잡술 심산인 것이다.
걸신들린 년.
달그락달그락, 과거로부터 울려 나온 이명이 여자의 귓전을 때렸다. 샤워기에서 찬물이 콸콸 쏟아진다. 먼저 오래 틀어 두었던 뜨거운 물이 공기를 데워 욕실 안이 아직 훈훈한데도 비눗물을 헹궈내는 팔뚝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네가 도둑개야?
왜 밥을 몰래 처먹어?
누가 보면 내가 쫄쫄 굶기는 줄 알겠다.
달그락달그락, 욕실 안을 채운 물소리가 여자에게서 멀리 물러난다.
어째 우리 조카는 나날이 덩치가 좋아지네.
모녀가 어쩜 저렇게 하나도 안 닮았을까 몰라.
아유, 그 집은 딸내미가 엄마 것까지 다 뺏어먹나 봐?
비눗기가 쪽 빠진 옷을 하염없이 주무르던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온 힘을 손아귀로 몰아 축축한 빨래를 힘껏 비틀어 짠다. 여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깡마른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달그락달그락, 아직 젊고 반반하던 시절의 어미가 현재의 시간 속으로 왈칵 틈입한다. 발가벗은 채 옹송그리고 앉은 여자의 몸피가 둥실둥실 과거로, 과거로 부풀어 오른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포동포동한 열네댓 살짜리 여자애가 방문 앞에 의자를 밀어붙여 두고 책가방에서 각종 주전부리를 꺼낸다. 팥빵, 곰보빵, 크림빵, 샌드위치, 삼각김밥, 핫바, 소시지, 맛밤, 아몬드초콜릿, 요구르트, 사과 주스, 우유……. 여자애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종이를 넓게 깐다. 노련한 손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끔 살금살금 포장을 벗겨내고 알맹이를 빼낸다. 종이 위에 수북이 쌓인 군것질거리를 바라보는 여자애의 눈동자에 반짝 불이 켜진다.
‘한 입만, 정말 딱 한 입씩만.’
여자애가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곰보빵. 부스러기가 종이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빵을 크게 베어 문다. 들키면 안 돼. 쩝쩝거리지 마. 몇 번 씹지도 않은 빵이 우유에 떠밀려 꼴딱 식도를 넘어간다. 빵 하나와 우유 한 팩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빈손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에서 깜빡 불이 나간다. 필라멘트가 끊긴다. 알전구처럼 빛나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중학교 때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자애는 번번이 용돈이 모자랐다. 돈이 떨어지면 친구에게 빌렸고, 빌리지 못하면 야밤에 까치발을 들고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체중이 급격하게 불더니 꾸준히 늘었다. 여자애는 늘 제가 먹은 흔적을 감쪽같이 지웠지만 비대해진 몸뚱이마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매번 제 몸으로 그 비밀스러운 식사를 폭로하고 말았다.
그만 먹어라 소리도 지겨워 죽겠다.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거야? 멀쩡히 눈이 있으면 저 거울 좀 봐라. 너는 그림 그리는 애가 당최 네 몸에 대해서는 미적 감각이 없니? 응? 너처럼 뚱뚱한 여자를 누가 데려가겠어. 이대로 평생 시집도 못 가고 내 옆에서 늙어 죽을래?
그건 여자애도 싫었다. 싫었지만 이미 식사는 여자애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에 있었다. 다른 애들보다 늦게 미대 입시에 뛰어든 마당에 시간을 쪼개 운동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운동을 했더라도 먹는 양을 따라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자애는 고민 끝에 먹되 먹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다. 음식을 파는 곳 근처에는 무릇 화장실이 있고 변기가 있지 않던가. 그거면 충분했다. 돌쟁이 아기처럼 살진 손가락에서 살이 내리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 세 번째 마디에 매일 홈이 파였다. 많아지고 깊어지는 잇자국과 함께 여자애는 여자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여자애의 몸피는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비만하던 몸무게가 저체중 수준까지 떨어졌고 체중뿐 아니라 체력과 기력도 곤두박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애는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했다.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실기 준비에 매달린 결과였다. 여자는 망설임 없이 기숙사에 입사했다. 아르바이트도 구했다. 그리하여 생애 첫 급여가 나온 다음날, 여자가 돈을 들고 가장 먼저 찾아간 장소는 정신과였다. 그때만 해도 여자는 자신이 정신과와 내과, 산부인과에 이토록 많은 돈을 바르게 될 줄은 몰랐다.
여자가 코끝을 찡긋거린다. 비린내. 아랫배가 콕콕 쑤셨다. 빨랫감을 움켜쥔 손가락이 스르르 풀어졌다. 졸졸졸…… 저만치 물러났던 물소리가 다시 여자에게로 돌아왔다. 여자는 세탁을 마친 잠옷을 수건걸이에 대충 걸쳐두고 수온을 따뜻하게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