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이 만큼만, 네가 남긴 만큼만
“그럼 한 입만.”
찬미는 진지했다.
“딱 한 입만 먹을게.”
한 숟갈 가득 밥을 푸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깝잖아, 남기면. 그래도 다이어트 중이니까, 정말 딱 한 입만.”
밥알이 수북한 숟가락이 찬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이내 입술이 맞물리면서 밥풀 하나 없이 깨끗한 숟가락이 입 밖으로 쏙 빠져나왔다. 빈 수저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부대찌개 건더기를 건지기 시작했다. 조각난 소시지와 햄, 부서진 두부, 어묵, 끊어진 당면, 조랭이떡……. 뜨겁지도 않은지 볼이 미어지도록 음식을 넣고 부지런히 씹는 찬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딱 이 만큼만, 네가 남긴 만큼만.”
무슨 주문이라도 외우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찬미가 재게 밥을 떴다. 찌개 건더기를 건지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국물은 아예 국자째 들고 후루룩거렸다. 여자가 남긴 밥이 뚝딱 사라졌다. 찬미는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추가했다. 아무래도 제 앞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여자와 무관하게 주문된 음식들이 차례차례 날라져 왔다. 치즈가 듬뿍 들어간 거대 계란말이, 모둠소시지와 감자튀김, 제육볶음, 뼈 없는 닭발에 소주 세 병. 불과 한 시간여 만에 찬미 혼자 먹어치운 음식들의 빈 그릇이 차곡차곡 쌓였다. 더는 들어갈 곳이 없을 성싶은데도 찬미는 쉬지 않고 음식을 쑤셔 넣었다. 지켜보다 못한 여자가 찬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입에 든 음식을 삼키지도 않고 또다시 종업원을 부르려던 찬미가 여자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놔!”
“더 먹으려고?”
새카만 눈동자에 공포가 서리더니 왈칵 초점이 흐려졌다. 오목하게 파인 눈구석으로 투명한 액체가 고여 들었다. 눈물에 비친 여자의 형상이 둥그렇게 부풀어 툭 터졌다. 가늘디가는 손목이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여자는 뒤따라가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자리에 남겨졌다. 물을 한 컵 마시는데 가게 안쪽에 날렵하게 그려진 빨간 화장실 마크가 보였다. 찬미가 사라진 쪽이었다.
“찬미야.”
화장실 마지막 칸에서 위장마저 토해낼 듯 격렬한 구토 소리가 흘러나왔다.
“찬미야, 너니?”
여자가 문을 탕탕 두드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너 이 안에 있지? 문 좀 열어 봐!”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문을 두드리는 여자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쾅쾅, 쾅쾅쾅. 주먹 쥔 손이 빨갛게 달아오를 즈음에야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달칵 잠금장치가 열렸다. 여자가 냉큼 문을 밀어젖혔다. 찬미는 변기 옆에 움츠리고 앉아 변기에 튄 토사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물끄러미 여자를 올려다보는 찬미의 이마에 땀에 젖은 앞머리가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갈라진 틈으로 낯선 흉터가 뚜렷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찬미는 여자의 부축을 마다하고 비칠비칠 자리로 돌아갔다. 등을 보이며 앉은 뒷모습이 차가운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병아리 같았다. 뒤따라온 여자가 잠자코 물을 건네자 병아리는 맥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먼저 일어선 쪽은 찬미였다. 까만 재킷과 퀼팅백을 팔에 걸치고 계산서를 집더니 그대로 일어나 카드를 긁고 나가 버렸다. 여자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가게 바깥으로 나가자 그사이 재킷을 갖춰 입은 찬미가 가로등 불빛 아래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거푸 한숨을 쉬는지 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여자는 그 곁으로 다가가 쳐진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찬미야.”
“서프라이즈!”
짐짓 경쾌한 목소리를 내며 찬미가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미안. 많이 놀랐지.”
여자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연이어 나올 말을 기다렸다.
“우리가 졸업하고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내가 전화번호 바꾸고 잠수 타기 전일 테니까 못해도 오 년은 넘었을라나. 자, 그럼 여기서 퀴즈! 그동안 내가 뭘 했을까요?”
찬미가 연신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이 너풀너풀 움직였다.
“나, 살 뺐어. 살만 뺐어. 지겹게, 죽도록. 처음에는 한 일 년 마음잡고 독하게 빼면 될 줄 알았다? 멋지게 변신해서 짜잔! 하고 등장할 계획이었지. 근데 그게 어디 맘처럼 쉽지가 않더라. 빼고, 찌고, 또 빼고, 또 찌고. 시간은 시간대로 가고, 망할 식탐은 식탐대로 느는데 진짜 미치겠더라.”
난데없이 칼바람이 불었다.
“내가 다이어트 성공하면 누굴 제일 먼저 만나고 싶었는 줄 아니?”
찬미의 긴 생머리가 사납게 휘날려 앞에 선 여자를 할퀴었다.
“너. 너였어. 대학 시절 내내 부러웠거든. 다른 애들이 너더러 비쩍 말랐다고, 살 좀 찌라고 그럴 때도 그저 부러웠어.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말라본 적이 없었으니까.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우량아였으니까.”
찬미가 손을 들어 앞머리를 걷었다. 길게 찢어진 상처를 꿰맨 자국이 훤히 드러났다.
“흉하지? 토하다 정신을 잃는 바람에 이마가 깨졌어. 그나마 자랑거리라곤 이거 하나뿐이었는데.”
앞머리를 슥 매만져 흉터를 감추는 찬미의 손길이 능숙했다.
“에이, 망했네, 망했어! 어떻게든 소주만 마시고 버텨볼 생각이었건만. 늘, 매번 이런 식이야. 어차피 토할 거면서 처먹기는 왜 처먹는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도무지 제어가 안 돼. 그래서 집 바깥에선 아예 음식을 입에 안 대는데, 아, 내가 왜 술집 가자고 그랬지?”
찬미는 어딜 보고 있는 것일까. 여자가 당장 뒤돌아보아도 여자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을 터였다.
“왜…… 무슨 석 달 열흘은 굶은 사람처럼…… 사람이라니, 그건 사람도 아니지. 짐승…… 무슨 짐승처럼…… 난 그냥, 그냥 너처럼 한 번쯤은 마른 몸매로 살아보고 싶었거든.”
여자가 슬그머니 제 오른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암튼 겉보기엔 성공이니까, 나, 사회생활도 다시 시작하고 네게 연락도 넣었어. 근데 이번엔 네 번호가 바뀌었더라. ……있지, 우연이었지만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정말 진심이야. 그럼 나 먼저 갈게. 한겨울에 길바닥에 서 있으려니까 무지 춥다, 야.”
씩 웃으며 손을 흔드는 찬미에게 여자는 아무런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저 휘청휘청 멀어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찬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바깥으로 꺼냈다. 고개 숙인 여자의 시야에 유명 여배우가 광고하는 소주 포스터가 들어왔다. 보도블록 요철이 그대로 드러날 만큼 발자국이 가득한데도 늘씬한 여배우의 미소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