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싫으면 저거, 저 문 비밀번호를 알려주든가
샤워를 마친 여자가 욕실 문을 열었다. 고추장과 참기름 냄새가 훅 끼쳐왔다. 텔레비전을 보며 주섬주섬 옷을 꿰입고 있던 어미가 힐끗 여자를 쳐다본다.
“나왔냐?”
“내려가게?”
“아주 그냥 얼른 보내고 싶어 죽겠지?”
어미가 샐쭉하게 눈을 흘긴다.
“올라온 김에 볼일 좀 보고 오려고 그런다, 왜. 두어 시간 나갔다 금방 들어올 거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붙어 있어. 그게 싫으면 저거, 저 문 비밀번호를 알려주든가.”
그야말로 당치도 않은 요구다. 여자는 입을 꾹 다물고 욕실 옆 벽에 붙여둔 삼단 서랍 세 번째 칸으로 손을 뻗었다. 팬티와 생리대를 꺼낸 여자가 말없이 욕실로 들어가자 어미는 승리감에 젖은 표증으로 의기양양하게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둘렀다.
“나 나간다.”
쾅. 현관문이 닫힘과 동시에 여자가 욕실에서 나왔다. 팬티만 입은 여자의 걸음걸이가 어기적어기적 우습다. 여자에게는 팬티에 덧붙은 물체가 주는 이물감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여자가 눈동자만 굴려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두 시 칠 분. 무슨 볼일인지는 몰라도 앞으로 두어 시간 후면 어미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제 어미를 데리러 나갔다 오느라 지체된 작업의 마감일이 촉박했다. 일 분이라도 빨리 작업을 시작하는 편이 득이다.
서랍 두 번째 칸에서 군데군데 물감이 묻은 면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를 꺼내 입은 여자가 부산스레 몸을 움직인다. 물통의 물을 갈고 말라비틀어진 붓을 촉촉하게 적시고 팔레트를 점검한다. 칠하다 만 그림은 어제 놓아둔 그대로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초콜릿을 꺼내 작게 부숴 입에 넣었다. 단 음식이 들어가니 비로소 정신이 깨어나는 듯했다. 남은 초콜릿을 조각내 접시에 담고 책상 모서리에 올려두었다. 작업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재깍재깍, 째깍째깍. 어미가 부재하는 공간에서 여자의 시간이 흐른다. 색색으로 물드는 종이와 물감 냄새, 입 안에서 서서히 녹아드는 초콜릿, 붓이 사각사각 종이 위를 지치는 소리. 그림에 몰입할수록 시곗바늘이 차츰 속력을 높인다. 여자의 손놀림도 덩달아 빨라진다.
소녀 머리에 얹힌 화관의 채색을 막 끝냈을 때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여자가 붓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비어 있는 왼손으로 아직 개키지 않은 이불과 베개를 들추려다 퍼뜩 누웠던 자리를 살핀다. 다행히 이불까지 새지는 않았구나, 안심하며 베개 밑에서 액정을 밝히고 있는 휴대전화를 찾아낸다.
금방 들어간다. 어디 나가지 마.
네 시 십육 분. 어미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읽은 여자는 신속하게 붓을 헹궈 내려두고, 옷걸이에 걸린 더플코트와 패딩점퍼의 주머니를 차례차례 뒤진다. 꼬깃꼬깃한 영수증, 끊어진 헤어밴드, 수명이 다한 라이터와 빈 담뱃갑. 돛대라도 남아 있을 줄 알았건만 오산이었다. 여자가 후다닥 패딩점퍼를 집어 걸치고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달랑 꺼내 집을 나선다. 빨리 걸으면 골목 슈퍼까지 삼 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급하니 평소보다 보폭이 배로 넓어졌다.
“어머머, 진짜?”
목청 좋기로 유명한 슈퍼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쩌렁쩌렁 울렸다. 여자가 피식 웃으며 골목을 막 돌아서는데 익숙한 뒤태가 발걸음을 붙들어 맸다. 금방 들어온다더니 이 추운 날 바깥 평상에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진 어미를 발견한 것이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두 아줌마가 왕왕 나누는 낯부끄러운 대화가 귓바퀴를 타고 여자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럼 진짜지.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행간 새김>의 첫 소설, "보리차가 끓고 나면"은 다음 편에서 완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