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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보리차가 끓고 나면 #6 (완)

적당히 식어 뜨겁지 않았다

by 해란

“그럼 진짜지.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의사가 그래? 폐경이라고?”


“그랬다니까 그러네. 방금 큰 병원에 가서 듣고 왔대도.”


“괜찮어?”


“시원섭섭해. 착잡하기도 하고.”


“아는 친구한테 듣기로는 그거 오면 땀도 엄청 나고, 얼굴도 벌게지고 그런다던데 자기도 그래?”


“나라고 뭐 별다르겠어. 몸뚱이에서 무슨 난리를 피우는지 아주 밤마다 죽겠어. 열이 홧홧 올라서 이불을 걷어차면 금방 춥고, 도로 덮으면 또 뜨겁고. 거기다 잠을 못 자고 누워 있으면 으레 출출하잖겠어? 예전 같으면 그냥 안 먹고 버틸 텐데, 요샌 나도 모르게 자꾸 뭘 주워 먹는다니까. 안 그래도 몸에서 열이 나 죽겠고만, 이놈의 몸뚱어리까지 커지니 집에서는 답답해서 팬티 한 장을 못 입고 있겠어.”


여자가 부재하는 공간에서 어미의 시간이 흘러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가 나올 때보다 느린 발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집에 도착해 꺾어 신은 운동화를 벗는다. 방바닥에 발을 디디다 말고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연다. 문틈에 슬리퍼 한 짝을 괴어 놓는다.


점퍼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여자의 발가락이 움찔 오그라들었다. 열린 문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모로 누운 여자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해일 같은 피로가 눈두덩에 몰려들었다.






눈을 뜨니 사위가 고요했다. 잠든 자세 그대로 깨어난 여자가 멀뚱히 정면을 응시한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어야 할 너부데데한 엉덩이가 없었다. 이부자리에 누운 부석부석한 얼굴도. 어미가 떠난 것이다. 멋대로 들이닥칠 때처럼 아무런 언질도, 예고도 없이.


한참을 뭉그적대던 여자가 겨우 일어나 부엌으로 나간다. 식탁과 냉장고, 가스레인지만으로도 가득 차는 부엌에 커다란 들통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저께 어미가 안에 이것저것을 넣어 끙끙대며 이고 올라온 들통이다. 들통에서 나온 물건은 찬거리와 볶은 겉보리, 집에서 쑨 묵이었다.


가스레인지 옆 좁은 싱크대를 떡하니 차지한 들통을 옮기려다 말고 여자가 동작을 멈춘다. 들통 뚜껑에 웬 쪽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물은 꼭 끓여 먹고, 쓰레기 묶어놨으니 고시랑대지 말고 내다 버려라.
피 얼룩은 무즙을 흠뻑 적셨다가 다시 세제 묻혀 찬물에 싹싹 비비면 잘 빠진다.


여자가 양은으로 된 들통 뚜껑을 들춰 본다. 보리차가 한가득했다. 여자의 눈길이 식탁 밑으로 향한다. 쟁여 두었던 생수병이 절반가량 사라졌다. 들통에 살짝 손을 대보니 불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아직 뜨끈뜨끈했다.


여자는 마른세수를 하고 옷장에서 꺼낸 더플코트 소매에 팔을 꿴다. 코트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지갑과 쓰레기봉투를 챙겨 건물 밖으로 나간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자가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내쉬는 호흡에 맞춰 뽀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맨발에 운동화를 질질 끌면서 걷는다. 쓰레기를 버리고 골목 어귀 슈퍼에 들러 라면과 담배와 라이터를 산다. 발이 시린 걸 꾹 참으며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구수한 냄새가 끼쳤다. 보리차가 끓느라, 끓여둔 보리차가 식느라 부지런히 방출했을 훈김이 방 안을 맴돌고 있다. 현관 앞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여자가 머뭇머뭇 방바닥에 발을 들여놓는다. 건조대에 널린 팬티와 잠옷이 보였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팬티는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데 곁에 걸린 잠옷 바지 엉덩이에는 핏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여자는 라면이 든 봉투를 식탁에 올려두고 부엌 창문을 연다. 낡은 경차들이 띄엄띄엄 주차된 좁은 길에는 오늘따라 꼬맹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두 팔을 벌려 보리차가 가득한 들통을 살며시 껴안는다. 나갔다 들어오는 사이 보리차가 적당히 식어 뜨겁지 않았다. 창밖 텅 빈 거리에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열린 창문으로 눈이 들이쳐, 어미가 남기고 간 쪽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 쪽지를 떼고 들통 뚜껑을 연다. 뚜껑 안쪽에 맺힌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리차가 끓고 나면"은 이것으로 완결입니다.

함께 읽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소설로 찾아뵙겠습니다.

쭉, 함께해 주실 거죠? :)


끝으로 매거진에 쓰인 커버 이미지를 여럿 제공해준 친구 N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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