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닿는 곳은 대강 치웠으니 젖병부터 얼른 소독해야겠습니다. 남은 비즈 정리는 그다음이에요. 그런데 놀란 가슴이 쉬이 진정되질 않는군요. 여전히 심장 고동이 널을 뛰고 목이 바짝 마릅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지 안 되겠어요. 마침 보리차가 담긴 유리컵이 식탁 위에 있기도 하니.
물맛이 미적지근한 게 영 별로예요. 하기는 어제 따라둔 상태 그대로 줄곧 여기 있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네요. 냉장고에서 새 물을 꺼내야겠습니다.
어머나, 냉장고 문에 무민이…… 무민과 무민의 여자친구인 스노크가 양쪽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가족사진을 붙잡고 있어요. 앙증맞기도 하지. 사길 잘했습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요 녀석을 발견하고 한눈에 반해 당장 주문했더랬지요. 무민과 스노크 말고도 무민의 아빠와 엄마, 친구들 캐릭터까지 모두 포함된 냉장고 자석 세트를 언니 몫까지 두 벌. 서로 똑같은 자석을 한 벌씩 나눠 가지고는 죽고 못 사는 단짝 여중생들처럼 우정의 징표 운운하며 깔깔댔던 언니와 나.
무민은 핀란드 숲 속 골짜기에 산다죠. 뽀얗고 오동보동한 몸에 몽땅한 팔다리, 댕그란 눈, 쫑긋한 귀, 크고 둥근 주둥이. 그러고 보니 언니였지요. 요 하얀 아기 하마처럼 생긴 무민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사람.
얘, 이것 좀 봐.
이게 뭔데? 하마 인형인가?
아니, 무민. 무민 인형이야. 너무 귀엽지 않니?
무민? 이 하마 이름이야?
하마가 아니래두. 잘 봐봐. 얜 하얗고 발가락이랑 꼬리도 길잖아.
그건 그러네.
내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눈을 반짝이던 언니. 무민의 무엇이 언니를 첫눈에 사로잡은 걸까요. 홀딱 빠져설랑은 원전인 동화책이며 인형, 무민이 그려진 컵이며 그릇을 마음에 드는 족족 사들였죠. 그런 언니 옆에서 괜스레 나도 기웃기웃…… 고놈 볼수록 귀엽다 싶은 게, 그러다 정이 들어 그만 풍덩. 근데 난 아무리 봐도 얘가 하마 같아요. 하마가 아니라면 하다못해 비슷하게 생긴 다른 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언니, 언니는 무민이 트롤이라는 게 믿어져요? 언니한테 듣기 전까지 나는 트롤이라는 단어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트롤이라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생명체인가 싶었는데 찾아보니 북유럽 설화에 나오는 괴물이더군요. 딱히 인간에게 악의를 가진 괴물은 아니라지만 설명을 보면…… 결혼식 중인 신부를 낚아채다 제 아내로 삼아버린다든가, 절세미인으로 둔갑해 아내 자리를 꿰찬다든가, 심지어는 여염집 아이를 훔쳐다 자기 아이와 바꿔치기하는 트롤도 있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정말로 악의가 없는지 아리송합니다.
가족사진을 맞붙들고 있는 무민과 스노크가 더럭 요사스러워 보여요. 한가운데 아기를 두고 앉은 엄마 아빠의 환한 미소도 왠지 아슬아슬한 게…… 아빠가 아직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이 집에는 지금 모녀뿐이지요. 만약 엄마가 잠깐이라도 아기에게서 눈을 뗀다면……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부쩍 이런다니까요. 유난스럽게 별별 노파심이 다 들어요.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랍니까. 어쩐지 무민한테도 미안하네요. 원형이 하마건 트롤이건 무민은 무민일 따름인데요. 무구하다 못해 어수룩한 무민 가족. 당최 거절이란 걸 몰라서 불청객이 들이닥쳐도 싫은 내색은 고사하고 도리어 제 집을 내주고 마는 평화주의자.
냉장고에서 꺼낸 보리차를 한 컵 가득 따랐습니다. 아아, 시원하다. 정신이 반짝 나네요. 다 마신 컵을 들고 곧장 싱크대로 갑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정말로 아기가 깨어나 버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