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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 #4

by 해란

슬슬 새벽이 자리를 뜨려는지 실내가 어슴푸레 밝아옵니다.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아래 서둘러 젖병을 대고 물을 담아 흔들어요. 쏴아, 찰랑찰랑 야옹…… 아마 이미 헹궈서 엎어둔 것들일 테지만 쏴아아, 찰랑찰랑 야아옹……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소독하기 전에 한 번 더.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죠. 아까부터 웬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요. 잠시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봅니다.


이상하네, 잘못 들었나.


마지막 젖병을 싱크대 위에 엎어놓고 수도꼭지를 잠갔습니다. 정적 속에서 분명 야아옹…… 다시 니야아옹…… 가느다란 고양이 울음소리가 갈수록 들릴 듯 말 듯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어요. 어째 으스스합니다. 설마하니 죽어가고 있는 걸까요.


겨울이었습니다. 드물게 오전 특강이 있는 날이었지요. 지난밤 걱정과 달리 일찍 눈이 뜨여 그해 첫 한파주의보를 들으며 여유롭게 화장을 했습니다. 그날은 이런저런 용무가 많은 날이었어요. 수업을 마친 뒤에 어디부터 들러야 하나,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리면서 오버코트의 단추를 채우고 목도리를 둘렀습니다. 칼바람 탓에 체감 온도가 영하 17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종아리를 감싸는 퍼부츠도 신었고요. 그야말로 중무장을 하고 아파트 현관을 나섰는데 건너편 화단에 웬 얼룩덜룩한 물체가 눈에 띄었습니다.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한데 뒤엉켜 딱딱하게 굳어 있더군요.


아무래도 얼어 죽은 것 같았습니다. 어미는 어디로 갔을까. 혀를 차며 등을 돌린 찰나 야옹…… 깜짝 놀라서 다시 뒤를 돌아보고 고양이들을 향해 귀를 세웠지만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헛들었겠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는데 왜인지 야옹야옹 소리가 종일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수업을 하고 이곳저곳을 돌며 볼일을 해결하는 내내 귓가에서 야옹, 야옹…… 예상보다 늦어진 귀갓길, 해 진 거리를 동동대며 걸어가다가 차도 한복판에 우뚝 선 남자를 목격했습니다.


남자는 이따금 발밑을 확인하며 마주 오는 차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어요. 차들이 남자를 비켜 지나가고, 인도의 행인 몇이 그를 흘깃 쳐다보고는 가던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쪽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빨간불에 딱 걸려버린 나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무람없이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검은 정장, 검은 구두, 잿빛 더블코트, 짙은 올리브색 목도리, 바닥에 세워둔 밤색 서류 가방, 그 곁의 노란 줄무늬 고양이. 네 발과 꼬리를 모두 같은 방향으로 두고 너부러진 고양이는 흡사 잠든 것처럼 보였어요. 그 처참하게 뭉개진 얼굴만 아니라면.


곧 파란불이 들어왔습니다. 중앙선을 조금 비껴 난 위치에서 계속 수신호를 보내던 남자가 돌연 동작을 멈추고 후닥닥 목도리를 풀더군요. 남자는 목도리로 얼른 고양이를 감싸더니 서류가방과 함께 품에 안고 뛰듯이 횡단보도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건너기 시작한 나와 비슷하게 건너편에 도착했어요. 가까이서 보니까 귀가 얼어서 시뻘겋고, 특이하게도 목덜미에 점 세 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나 있더라고요. 무심결에 피식 웃었는데 갑자기 머릿골이 울리면서 관자놀이가 발딱발딱 뛰었습니다. 종일토록 야옹대던 이명이 스리슬쩍 사라져 있었거든요.


그나저나 냄비가 안 보이네요. 삶아야 할 젖병이 여러 개라 이놈보다는 큰 냄비가 필요한데 어디에 들어 있을는지. 이쪽 찬장에는 그만한 냄비가 들어갈 리 없으니 저 어디쯤 있으려나.


속이 깊은 스테인리스 냄비를 꺼내 물을 받습니다. 젖병을 헹구기 전에 이것부터 미리 해 둘걸 그랬어요. 물이 끓으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미리 물을 올려뒀다면 조금이나마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텐데. 별수 없죠. 후회해 봐야 소용없으니 지금은 그저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간편하게 전자레인지로 소독하는 방법도 있다지만 난 그건 좀 그래요. 그냥 못 미덥기도 하고,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에 겨우 뉘인 우리 공주님이 깨면 어떡하나 싶어서. 입력한 시간이 완료되면 극성맞게 삐이 삐이 울어대는 것도 끔찍하고요.


식탁 의자에 앉아 가스 불꽃을 바라봅니다. 언니 말이 맞네요. 고요히 일렁이는 작은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져요. 흩날리는 눈송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실바람에 몸을 흔드는 이파리. 이렇게 예사로운 것이 지속적으로 묵묵히 움직이는 정경을 보면 마음이 잔잔해진다고 언니가 그랬죠. 옛날에, 언니가 고무신 신고 님 기다릴 적에 특히 효험을 봤다면서 나한테 추천해 줬잖아요.


그래, 일방적으로 연락 기다리는 거, 그거 무지 괴롭지. 나도 옛날에 우리 그이 기다릴 때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라. 네 살이나 어린 애인을 몇 달 남짓 만나다 덜렁 군대로 보냈으니. 내가 진짜 그이니까 기다렸다.

어유, 닭살! 열녀가 따로 없네.

얘는, 내 사정 다 알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나한텐 그이밖에 없잖니.

언니야말로 사정 빤히 아는 노처녀 앞에서 꼭 그래야겠어?

나도 지지리 연애하다 네 나이 지나서야 결혼했잖어. 노처녀라니 아서라, 아서. 서른하나면 아직 한창때야.


언니, 언니는 알고 있었어요? 남자 연락이나 기다리며 안달복달하는 꼬락서니를 보고도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언니뿐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