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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 #5

by 해란

우리 그이는 나보다 네 살이 연상이니까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예비군까지 다 마쳤는데도 군대 간 사람보다 더 연락할 줄을 몰랐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하는 수 없이 매번 내 쪽에서 연락을 해도 답장조차 제대로 주지 않아서 나중에는 자존심도 많이 상했어요. 혹시 나만 그이를 좋아하나. 유치한 불안감에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버텨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제는 전부 지난 일이지만요. 다 추억입니다.


물이 팔팔 끓어요. 다가가 냄비 뚜껑을 여니 뜨거운 수증기가 훅 쏟아져 공기 중으로 흩어집니다. 가스 불을 켜둔 채 집게로 젖꼭지를 하나씩 집어서 냄비에 넣었다가 재까닥 건져내요. 말랑말랑한 젖꼭지는 이렇게만 해도 충분히 소독이 된다니까요. 젖병은 잠시 물과 함께 끓도록 놔둘 생각입니다. 너무 삶으면 외려 유해 물질이 나올 수도 있다니 이대로 오 분, 아니 딱 삼 분만.


그사이 바닥을 좀 치워야겠습니다. 어느새 불을 켜지 않아도 웬만한 것은 다 보일 만큼 날이 밝았어요. 곧 아기가 깨어날 듯싶습니다. 끽해야 삼 분인데, 그동안 치워봐야 얼마나 치우겠느냐마는 적어도 아기방 앞을 굴러다니는 것들이나마 주워놔야지요. 작디작은 비즈 알이 행여 아기 입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앉은뱅이걸음으로 이동하며 바닥에 흩어진 비즈들을 주워요. 가운데 구멍이 뚫린 갖가지 크리스털비즈들을 한 알 한 알 줍고 있자니 아아…… 제쳐 두었던 졸음이 단박에 몰려듭니다. 눈앞이 가물거려서 자꾸만 헛손질을 하고 있어요. 어쩌죠, 삼 분이 지나기 전에 한 알이라도 더 주워야 하는데……

그래……

잠이 달아날 만한 걸 상상해 볼까요.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몸서리가 날 만큼 무섭고 섬뜩한…… 야옹…… 고양이…… 차에 치어 짓뭉개진 노란 줄무늬 고양이의 머리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칩니다. 언니, 제가 왜 이러죠.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올리브색 목도리로 고양이 시체를 안아 들고 사라진 남자와 재회한 것은 그 이듬해 겨울이었습니다.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 문화센터 건물로 돌아가는데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묘하게 낯익더군요. 검은 정장, 검은 구두, 잿빛 더블코트, 짙은 군청색 목도리, 왼쪽 어깨에 걸친 밤색 서류 가방. 지금 생각해 보면 길 가다 흔히 마주칠 법한 뒷모습인데도 희한하게 눈길을 끌더라고요.


누구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해서 나도 모르게 남자를 쫓아가다가 그만 문화센터 건물 맞은편에 자리한 카페까지 따라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점원이 인사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파뜩 정신이 나더라고요. 바로 돌아나가기가 뭐해서 일단 가까운 자리에 앉았습니다. 남자는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실내에 들어오니 더웠는지 한 겹 한 겹 목도리를 풀어내면서요. 그런 와중에 남자의 일행이 카페에 들어섰습니다. 폴짝이며 걸어와 보란 듯이 남자의 팔짱을 끼더군요.


언니.


언니가 그 카페에서 그이 목도리를 받아들다가 나를 발견한 건 내가 그이 목덜미에 난 점을 발견한 것과 거의 동시였어요. 삼각형 모양으로 난 세 개의 점. 그 점들이 콕, 콕, 콕, 내 가슴속으로 박혀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언니의 눈동자가 반가움으로 커지는 모습을 지켜보았지요. 두 사람이 내게로 다가오는데 내 눈에는 오직 그이 한 사람만 담겼습니다.


당신, 인사해. 내가 얘기한 적 있지? 우리 리본공예 선생님.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와 목례. 공중에서 만난 우리의 눈빛이 하나로 얽혀들고, 아울러 맞잡은 손에 당신이 은근하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어요. 우리의 영혼이 서로를 향해 엎질러진 것은.


그날 이후 이따금 그이를 봤습니다. 느닷없이 비가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수업이 끝날 시간에 맞추어 맞은편 카페에 나와 있던 그이. 그이가 언니의 마중을 핑계 삼아 나를 보러 왔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강생보다 늦게 강의실을 나갈 수밖에 없는 내가 언니를 앞질러 그이를 만나기란 불가능했어요. 여기까지 와서는 내 얼굴조차 못 보고 언니와 함께 돌아가는 당신 뒷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어찌나 가슴이 저리던지.


나는 그저 강의실 창문에 붙어 서서 눈으로나마 멀어져가는 당신을 배웅했습니다. 미안하다고, 나도 많이 보고 싶다고 문자메시지도 보냈죠. 도통 답장이 오지 않아서 어떨 때는 그런 내 처지가 가련하기도 했지만요. 이러나저러나 내가 언니랑 친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당신 전화번호가 바뀌거나 당신에게 축하할 만한 소식이 생겨도 모를 뻔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운이 좋은 점은,


앙―


앗! 아기가 깨어났습니다. 기다려요, 우리 공주님. 엄마가 금방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