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어울리는 태도(혹은 연기)가 필요하단 이들에게 던지는 작은 돌멩이
“너 참 소녀 같다.” 나는 딸기빙수를 앞에 둔 채 손짓발짓을 써가며 어제 본 영화 줄거리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친구가 내게 소녀 같다고 말했다.
마냥 반가운 말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소녀 같다는 말이 욕으로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칭찬을 욕으로 꼬아서 듣고 있는 건가? 글쎄, 아무래도 좋은 말 같지가 않았다.
거울을 보니 앞니에 딸기가 붙어 있었다. 소녀 같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사이에 낀 딸기도 모른 채 활짝 웃으면서, 남 얘기는 듣지도 않고, 침을 튀기면서 몇십 분이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런 것?
나이에 어울리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애티튜드’라고 일컫는 것들이다. 아나운서처럼 나지막한 목소리, 어떤 말에도 흥분하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 기대고 싶을 만큼 의젓한 모습….
졸업반이 되면 선배답게 멋있는 조언을 해줘야 할 것 같다, 경험도 풍부하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울리는 메이크업과 정장을 차려입는 센스까지 겸비한 그런 사람들은, 소녀 같다거나 아이 같다는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다.
그런데 ‘소녀 같다’는 말에는 어쩐지 ‘여리다’, ‘약하다’, ‘나잇값을 못한다’, ‘어른스럽지 않다’는 말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을까?
나를 아껴주셨던 교수님들의 말씀이다. “자네는 약간 들떠있어. 조금만 차분해지면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날 텐데.” “머리를 꼭 말총처럼 묶어야겠나? 어린애 같아. 면접에 들어갈 땐 단발로 단정히 자르도록.” “(면접을 앞둔 나에게) 더 진지해져야 돼. 나이브해 보여.”
인턴 하기 전에 학교 선배가 해준 조언도 있다. “가방의 꽃무늬가 너무 커서 아이 같잖아. 패턴 없는 무채색 가방으로 바꿔봐.” “‘다나까 체’로 말하면 어르신들이 좋아하셔.” “몰라도 우물쭈물 말하지 말고 잘하는 척해. 어른스럽게 행동하면 다 통해.”
그래. 다들 좋은 마음으로 해준 조언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에게서 지속적으로 “너 자신을 바꿔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머리가 어지러워질 것이다.
토익 성적을 올리라면 문제집이라도 풀 텐데. 태도나 성향을 바꾸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지난 이십 몇 년 동안 내게 가장 잘 어울렸던 옷을 순식간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조그마한 빗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더니,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어온 조언들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좋아했던 나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은, 반드시 고쳐야 할 단점으로 바뀌었다.
나 자신이 미워졌다. 내가 여물지를 못해서 취업을 못 하나봐, 그러니까 ‘넌 그것밖에 안된다’는 말이나 듣고 사나봐…. 센 척이라도 해볼까?
결국은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말하는 아이다움을 없애고, 나이에 맞게 어른스러워져야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혔다.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는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바보 같거나 유쾌한 태도가 활력소가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이것은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내 것을 고수하면서 복불복으로 붙거나 떨어질 것이냐, 아니면 어른 코스프레를 해서 일터에 진입할 것이냐, 가장 바람직한 해피엔딩은 내 마음대로 살면서 취업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녹다운 됐다. 어른스러운 ‘척’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런 것은 금방 탄로가 나곤 했다. 결국은, 타고 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며칠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그 말을 꺼냈다. “너 참 소녀 같다.” 하필이면 내가 요즘 욕으로 듣고 있었던 바로 그 말.
우리는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아까 들은 노래에 관해 열과 성을 다해 얘기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바보 같았나?
고민도 잠시, 따져 물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철없다는 거야? 영구 같다는 거야? 띠리리리리?” 남자친구는 내게 필요한 답을 줬다. “철없는 사람에게는 철없다고 말하지. 소녀 같다고 말하지는 않아. 다들 나이를 먹으면서 잃어버리는 것을 아직도 갖고 있다는 얘기야. 대단해.”
어릴 때 좋아했던 『빨간 머리 앤』이 떠올랐다. ‘소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난 오랫동안 앤에게서 등을 돌리고 살았다.
책 속의 어떤 부인은 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앤은 무지개처럼 여러 가지 빛을 지니고 있는데다 빛깔들도 하나같이 사랑스러워. 어렸을 때만큼 재미있진 않지만 그 아인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나는 그렇게 사랑이 우러나게 하는 사람이 좋아. 그러면 내 마음도 쉽게 줄 수 있으니까.”
없애보려고 노력해봤지만 없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 사이에 뭐가 붙은 줄도 모르고 깔깔거리거나, 핸드폰 게임을 하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치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꺼이꺼이 울거나, 바보 같은 말과 행동으로 눈총(!)을 사거나….
그러나 만약 이것이 내가 가진 여러 가지 빛깔이라면? 누그러뜨려서도 없애서도 안 되는 소중한 무엇이라면?
어린아이는 사랑스럽다. 그리고 마음을 쉽게 내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전쟁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내 안의 어린아이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