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얻은 23번째 삶

병원에서 아픈 사람들을 보며 내가 한 상상

by 노르키

병원 로비에 들어서면 세상에 아픈 사람이 참 많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수액을 꽂고 핸드폰 통화를 하며 깔깔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목에 전자기기가 달린 깁스를 하고 걷는다. 혼자 걷기 어려운 이들도 있다. 어떤 할아버지는 이동 침대에 누워 간호사의 도움으로 어디론가 실려가는데, 힘없이 훤히 드러난 정수리엔 몇 가닥 흰머리가 남았다.

몇 주 전엔 나도 병원에 혼자 오지 못했다. 며칠 동안 펄펄 끓던 열을 참고 참다가 주말에 응급실로 갔다. 구급차도 응급실도 태어나 처음이었다. 수액을 맞고 피검사와 CT 등 몇 가지 검사를 받고, 안정을 찾은 다음엔 걸어서 나왔다. “며칠 주사만 맞으면 돼요.” 그 말에 얼마나 안심했던지. 새삼 몸의 회복력에 얼마나 감사했던지. ‘이렇게 영원히 젊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병원에 오는 마지막 날이다. 접수처에서 대기번호표를 뽑았더니 내 앞엔 30명이 기다린다. 열흘 전엔 그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었지. 절박했던 그때 마음이 지금은 그만큼 생생하진 않다. 옆에선 핏기 없는 아이가 휠체어에 앉아 엄마에게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절박한 사람들이 많다. 그저 아프지 않기를, 무기력해지지 않기를, 또는 이 아픔이 어서 끝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상상해본다.

태어나기 전 우리가 한 줄기 빛이었을 때, 우리들은 ‘탄생 관리소’에 찾아가 관리소장과 대화를 나눴다. 인간들이 ‘염라대왕’이라 부르는 이 관리소장은 사실 무서운 사람은 아니다. 인간세상에서 제 몫을 다한, 그러니까 생명으로서의 삶을 실컷 느끼고 돌아온 영혼들을 휴식처로 보내 푹 쉬게 해 주려는 게 관리소장의 임무일 뿐이다.

그곳에서 영혼은 고된 노동과 불안에서 해방된다. 온종일 케이크를 먹거나 낮잠을 자거나 모히또를 마시거나 책을 읽다가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 된다. 대부분은 그곳에 가려 하지만, 그중 엉뚱한 몇몇 영혼들은 관리소장을 설득하려고 한다.


“저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왜? 자네 기록을 보라고. 78년을 살면서 ‘죽고 싶다’는 말을 2,875번 했고, ‘더러워서 못 살겠다’는 말은 3,749번이나 했잖아.”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저 지금처럼 살긴 싫다는 말이었지, 아예 세상과 안녕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자네, 기쁨과 희열, 쾌락과 더불어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되풀이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네, 다시 걷고 구르고 넘어지고, 춤추고, 울고 웃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근데 결국은 한 번도 춤추지 않았고, 넘어지지도 실패하지도 않으려고 애쓰다가 아무것도 안 했지.”

“아..... 네....”


관리소장은 난감하다.
“이렇게 사정하는 당신들에게 보통 딱 한 가지만 말한다니까.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그 절박한 마음, 간절한 얼굴로 내게 다시 돌아오라고. 지독하게도 원해서 다시 태어난 영혼들이잖아. 그런데 보통은 그렇지 않아.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다들 찌글찌글해진 얼굴로 돌아온다니까.

자네에겐 한 가지 더 말해주지. 뭐가 되려거든 딱 하나만 해. 지난 생에 자네는 이루고 싶은 게 많았어. 너무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화병을 얻어서 픽 쓰러졌지. 지난 삶도 그렇게 사정사정해서 얻어냈으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며 죽어버리면 내가 뭐가 되겠어? 기회를 딱 한 번만 더 줄 테니 이번엔 이걸 해보라고.”


“뭐가 되면 돼요?”


“내가 얼마 전에 구립 저세상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발견한 단어인데, 그게 좀 마음에 들었어. ‘사랑의 거장’이 되어봐. 어때? 갖지도 못할 것에 종종걸음 치며 울고 불고 떼쓰는 것보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꾼이 한 번 되어보라고. 너도 한 번 살아봐서 알겠지만 거기에서 뭔가를 할 필욘 없어. 그저 느끼고 오면 되는 거야. 그저 살아서 울고 웃고 기뻐하고 고통받고 또 사랑하고, 그러기만 하면 된다고. 근데 너 또 이거 다 잊어버리겠지? 지난 22번의 기회처럼?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기회 안 줄 거야.”

나는 태어났다. 필연으로 보일 만큼 아주 희귀한 확률의 우연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탄생 관리소 소장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 어렵게 얻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아픈 날도 있고, 울고 토하고 주사 맞고 무기력하고 세상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날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게 내가 간절히 설득해서 얻어낸 23번째 삶이라면?

사람이 80년을 산다면 그중 진실로 내게 좋은 시간은 몇 년이라고 생각해?

그 좋은 시간을 늘릴 힘은 아직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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