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과호흡이 다시 찾아왔다. 과호흡은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숨이 모자라는 느낌이다. 3년 전에 처음 느낀 신체적 반응이었다. 퇴근하는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숨이 콱 막혀 제대로 호흡할 수가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역에 내려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10분 정도 앉아있으니 조금 진정됐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을 때 의사는 내 폐가 깨끗하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상담을 받아보세요.” “네? 전 스트레스를 별로 안 받는 편인데요. 요즘 힘든 것도 딱히 없어요.” 어쨌든 조언대로 과일과 유산균을 열심히 챙겨 먹었다. 시간 나는대로 이불 속에 누워 푹 쉬었다. 7주 동안 상담사를 만나 직장 스트레스부터 학창시절 같은 반 애랑 사이가 안 좋았던 기억까지 다 끄집어냈다.
상담의 조언대로 나를 위한 시간도 만들었다. 통장에 넣어둘 줄만 알았던 월급도 야금야금 써봤다. 헬스장에서 PT를 끊었다. 배우고 싶던 춤을 등록했다. 친구를 꼬드겨 비행기를 타고 태국 방콕으로 날아가 어깨에 타투를 하고 노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사진 속 나는 코끼리 무늬 원피스를 입고 맥주잔을 들고선 깔깔 웃고 있었다. 즐거워보였다. 그게 나라는 사실이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그러니까 얼굴은 낯익은데 표정은 낯설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세상 고민 없어보이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몇 달이 지나 과호흡이 조금씩 사라졌다. 얼추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고는 3년이 지났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다시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지난 1월 미국으로 출장 다녀온 지 1달만에 코로나가 퍼졌다. 몇 달 전엔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일하고 있었는데 이젠 언제 다시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싶다. 회사는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동네 떡볶이집과 영화관은 문을 닫았다. 회사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끝났고 다른 새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재택하는 동안엔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아침 스트레칭을 한 다음 노트북을 켰다. 나는 최대한 안전을 기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선에선 최악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과호흡이 지금? 이유를 모르겠어. 난 지금 나쁘지 않아. 나쁠 게 없어. 영문을 몰라서 막막했다.
정말 원인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걸까? 나도 깨닫지 못했던 불안과 고통이 더 남아있는 건가?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걸까?
“옛날 뱃사공은 불안하지 않지. 어제도 뱃사공이었고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언제나 뱃사공일 테니까.”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책 <불안>에서 불안의 이유를 ‘불확실성’이라고 말했다. 예측이 가능하다면 불안하지 않고, 예측이 어렵다면 불안하다. 뱃사공의 미래는 예측할 수 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이 바뀌거나, 프랑스 혁명 같은 민중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는 죽을 때까지 뱃사공으로 살아갈 터이다. 농부나 상인이나 역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게 아닌 것을 꿈꾸며 고민하지 않는다. 노를 젓는 동안엔 농부나 상인으로 이직을 계획하지 않는다. 그의 고민은 철저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른다. 노를 젓는 일, 저 나루터에 제대로 도착하는 일, 뱃삯을 확실히 받고, 가족들과 먹을 저녁거리를 마련하는 일.
뱃사공은 스스로 뱃사공을 꿈꾼 적은 없었지만 뱃사공의 삶이 싫어 강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다른 인생을 꿈꾸는 게 불가능했으며 꿈꿀 이유가 없는 신분 사회에서 살았으니까. 어릴 적 나는 방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내가 누빌 도시들의 이름을 외우며 자랐다. 튀니지의 구시가지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보고,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프랑스어로 떠드는 상상을 하며 잠들었다. 여자가 교황이 되는 소설을 읽었고, 여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논픽션을 읽었다. 선생님, 무역가, 외교관, 기자… 무엇이든 되고 싶었다. 가능하다고 믿었다.
선택의 폭이 넓어보이던 만큼 선택의 책임도 오롯이 내 몫인 것처럼 보였다. 불안은 오랫동안 끈질긴 동반자였다. 친구라고 말하기엔 불편한 녀석, 그저 데리고 살아야 함을 인정해야 하는 존재. 불안의 뒤편엔 살짝 불룩해진 ‘자의식’이 있다. 국어사전에 ‘자의식’의 뜻이 나와 있다.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나 자신의 행동, 성격 따위를 깨닫는 일’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나는 언제 불안하냐면, 자의식이 조금 부풀어오를 때다. 내가 더 좋은 걸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내 상태가 성에 차진 않는다. 그러나 현재에서 벗어날 실력이나 돈은 부족하다. 내 삶의 방향키가 내 손에 없는 느낌이다. 힐링, 욜로, 여행… 유행하는 것들의 유효기간은 내겐 약 3년쯤이거나, 임시 처방전밖에는 되지 않았다.
자기 상태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실력이 있으면 휴식하거나 원하는 그 어딘가로 옮겨가면 된다. 그러나 스스로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도태될까봐 불안하다. 지금 내가 처한 위치나 나의 행동, 성격, 또는 내 눈에 비친 나 자신이 마음이 안들 때도 불안하다. 회사에선 일을 잘 하고 있나? 내가 하고 싶던 일인가? 그나저나, 내가 하고 싶던 것은 뭐지?
주변에선 내가 감사하고 행복해야 할 이유는 넘친다고 했다. 맞다. 나는 감사하다. 언제 다 갚나 막막했던 학자금도 다 갚았다. 언제든 훌쩍 떠날 기차표를 살 수 있다. 여름 휴가에는 비행기표를 고르게 될지도 모른다. 갈 수 있는 곳이 생긴다면 말이다. 가격을 신경쓰지 않고 디저트를 골랐다. 며칠 전엔 몸에 좋다는 유기농 주스를 주문했다.
거울을 바라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본질은 뭘까? 직장인, 30대 초반, 글 쓰는 사람, 독서가, 여자, 딸, 친구. 이것만으론 정확하지 않다. 직장도 나이도 인간관계도 언젠간 변하고 마는 것들이다. 어쩐지 뭔가를 연기하는 기분이 든다. 직장인을, 30대 여성을, 글 쓰는 사람을, 괜찮은 딸, 괜찮은 친구를 연기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십진법에 맞춘 나이에 따라, 나는 20대엔 자유로운 청춘을 연기했고 30대엔 어른을 연기하는 것 같다. 막막하다. 그토록 내가 찾아 헤매는 나의 ‘진짜’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또 다시 똑같이 살기를 원하는가?”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토씨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 완전히 똑같은 인생이 무수히 반복될 것이다.” 이건 그가 말한 ‘영원 회귀’다. 과학적 논증은 잠시 접어두자. 니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영원히 되풀이되어도 좋을 만큼, 지금 이 삶을 살아라. 삶을 사랑하라.”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며 내 운명을 사랑하는 것. 그는 이것을 ‘아모르 파티’라고 불렀다.
“이게 인생인가? 다시 한번 살고 싶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삶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내가 풀어야 할 과제는 나를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들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