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그걸 밀어붙여야 돼!”
지난해 겨울, 친구랑 이태원 거리를 걷다가 작은 노점이 눈에 들어왔다. 코가 시리도록 추운 날이었는데도 유독 그곳만 사람들 줄이 길었다. 가까이서 보니 점집이었다. 줄 끝에 있던 커플에게 “여기 다 줄이에요?”라고 물었더니 “여기 유명하대요. 저희도 20분째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커플 말을 듣고 우리도 홀린 듯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려서 들어가니 안경을 쓴 아주머니가 생년월일을 물었다. 친구부터 시작이었다. 친구의 정직하지만 고집스러운 성격을 곧잘 짚어내는 것 같아서 나는 무릎을 치며 즐거워했다. 물론 속으로는 ‘관상 보고 눈치껏 말하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이젠 내 차례였다.
“자기는 남들이랑 주파수가 좀 안 맞다. 그치?
남들이 재밌다는 건 흥미 없고, 내가 재밌다는 건 남들이 관심 없네. 맞지?”
옆에서 친구가 웃었다. “정확하시네요. 제 친구 좀 특이해요.”
나는 왠지 멋쩍은 기분으로 “그런가...?”라고 웅얼거렸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는 나, 주변 사람들이 관심 없는 것에 흥미를 가졌던 나. 어릴 적부터 그건 내겐 숨기고 싶은 아픈 부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와 클래식과 힙합과 다큐에 관해 얘기할 때마다 돌아오던 말들, “너 참 이상해.” “잘난 척하는 거야?” 그 말이 듣기 싫어서 나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괜히 관심도 없는 인터넷 소설과 아이돌과 최신 핸드폰에 관심을 붙여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게 흥미 없었을 뿐이다.
마음 맞는 친구를 실컷 만나고 싶었지만, 나랑 잘 통하는 사람은 학교엔 도무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 영화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 나를 그대로 드러내면 거부당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10대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짝꿍에게 좋아하는 책에 관해 흥분해 얘기했는데 “그런 거 말고 만화책이나 보자”라던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학교에서 애들은 아침마다 새로 산 물건에 관해 얘기하곤 했다. 새로 산 화장품, 새로 산 가방, 새로 산 MP3 플레이어, 새로 산 틴트... 더는 모르겠다. 나는 그것들에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것을 말하면 이상한 사람이 될까봐, 재미없는 애로 낙인찍힐까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잡지사에서 에디터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 아이템 대중적이야? 사람들이 좋아해? 아니, 너 혼자 재밌다고 생각하는 거 말고, 사람들이 좋아하냐고?” 나도 대중의 한 사람인데도 나의 기호는 중요치 않다고 단정 짓는 그 선배의 말이 비논리적이며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때 나는 ‘그런가? 역시 내 것은 중요하지 않은가?’라고 물러서버렸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책과 영화는 마이너하다고 하니까. 새로 나온 물건과 유행하는 영상과 웹툰과 음악을 즐겨 보고 듣고 좋아하며, 따라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가면서 “하하, 그래요?”라고 어색하게 웃던 찰나, 사주 보던 아주머니가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너 남의 것 따라가면 안 된다.
너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거 지키고 밀어붙여야 돼. 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어.
계절은 여름이고, 너는 태양이라고 나오거든. 자기 것 쨍하게 드러내며 살아. 그래야 잘 되는 길이야.”
밖에 나왔는데 어쩐지 카운슬링을 받은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주변에서 내 눈에 띄는 ‘행복천재’들이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부끄러움 없이 내게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아니, 때로는 부끄러워하지만 그렇다 해도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다. 새벽 2~3시까지 영화를 보는 습관이 있는 내 남자친구도, 아이돌 영상을 보며 행복해하는 내 친한 친구도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너도 좋아해야 한다고 강요하진 않는다. 하지만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 없다는 말처럼, 혼자만 알고 좋아하기엔 이 세상에 미안하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와서 입 밖으로 표현해버리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건 말건, 뭐라 하건 말건, 이들은 내가 발을 디뎌본 적 없는 풍요로운 세계에서 오늘도 씰룩씰룩 웃으며 느긋한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악동뮤지션이 자기 음악을 부끄러워했다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았겠지. 그러면 나도 지금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릴 수 없었을 거야. 시인이 자기 시를 부끄러워했다면 그의 글은 영원히 서랍 속에 묻혀있었을 테니 그 시를 보며 나도 감동받을 수 없었겠지. 밀어붙이고 지켜야 할 나만의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내가 좋아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 후기
몇 달 뒤 다시 그 거리를 갔는데 노점은 온데간데 사라졌지만
사주 아주머니의 그 말만큼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답니다.
여름 태양이라니, 낭만적인 카운슬링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