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3주, 나도 태동을 느낀 걸까?
임신 10주 이후부터 새벽에 잘 깬다. 엊그제 새벽에도 3시 반쯤 눈을 떴다. 추위 경보가 내린 날이었다. 안방 창문과 벽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지금 사는 집은 웃풍이 꽤 든다. 지난주부터 극세사 이불을 꺼냈다. 극세사 이불 아래 봄가을용 솜이불까지 덧대었다. 그렇게 이불 2개를 덮으면 얇게 입어도 몸에서 땀이 난다. 잠은 깨버렸고 책을 읽을까? 하지만 머리맡의 독서등을 켜진 않았다. 야근해 늦게 들어와 잠든 남편을 깨우고 싶진 않았다.
나는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아랫배에 손을 얹어보았다. 며칠 새 아랫배가 훨씬 단단해졌다. 어젯밤보다도 배가 조금 더 커지고 딱딱해진 느낌이었다. 아기들은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걸까? 얘는 잠들어 있을까? 그때 배 아래에서 손가락으로 톡 건드는 촉감이 들었다. 지금껏 느낀 적 없는 움직임이었다. 아기의 발가락인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열어 '16주 태동'을 검색했다. 모두가 태동을 느끼는 시기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느낀다고도 했다. 나도 태동을 느낀 걸까?
2주 전 초음파 영상에서 본 아기는 활발히 꼼지락거렸다. 우리 둘은 그걸 보며 벅차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새삼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요즘은 자기 전에 클래식과 크리스털 싱잉볼 영상을 찾아 듣는다. 나는 클래식이 참 좋다. 고등학생 때는 관현악 동아리에서 바이올린을 했었다. 사실 나는 바이올린을 17살에서야 배웠기 때문에 썩 잘 하진 못했었다. 결국은 청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피아노 반주자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연초 동아리 공연에서 피아노라도 칠 수 있어 기분은 좋았다.) 어쨌든 학교 생활에 지칠 때마다, 첼로 하는 친구와 음악실에 올라가 피아노를 두드리던 시간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린 종종 탱고 악보를 꺼내, 피아노 뚜껑을 열고 첼로를 꺼내와 함께 연주했었다. 나처럼 우리 아이도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소리를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엊그제 밤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를 들었다. 어젯밤엔 유튜브로 싱잉볼 연주를 틀어두었더니, 평소엔 늦게까지 책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잠드는 남편도 눕자마자 조그맣게 코를 골며 잠들어버렸다. 오늘 아침엔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을 틀었다. 말러 교향곡 가운데에서도 아주 유명하고, 또 그중에서도 아름답고 유명한,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4악장이다.
아직 임신 16주인데도, 나는 5년 10년 후를 상상하게 된다. 아이가 나중에 커서 피아노를 치거나 바이올린 켜는 상상을 해본다. 클라리넷을 불어도 좋을 것 같다. 잘 하든 못하든 예쁘고 뿌듯할 것 같다. 내가 낳았기 때문에, 세상에 없던 소리가 하나 더해지는구나... 싶을 테니까. 아이가 활을 움직이거나 비브라토를 연습하거나 피아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면, 뿌듯해서 심장이 아프고 가슴이 콱 조일 것 같다.
엄마가 될 준비를 하는 나는, 이젠 우리 부모님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잘하든 못하든, 아이가 그냥 무언가를 하는 것이 예쁘게 보였을 것 같다. 일어서기, 걷기, 뛰기, 웃고 떠들기, 글자 읽기, 피아노 치기, 공부하기, 친구 사귀기...
엄마는 어릴 적의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글도 잘 읽고, 어려운 책을 꺼내 읽고, 공부도 곧잘 하고, 학교에서 임원도 하고, 저요 저요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그래서 (내 입장에선 웃긴 얘기지만) 엄마는 우리 집에 천재가 태어났구나 싶었다고 했다.
고 2 때는 학교 논술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고 3 때는 향토 백일장인가? 정체불명의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학교 교지에도 내 글이 실렸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그때를 떠올려준다. "그때 선물로 스피커를 주더라. 바로 너희 아빠가 가져가던데."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한 대회였다. 고등학생에게 상품으로 스피커를 주다니. 아마도 스피커 회사에서 협찬받았을 테지만. 향토 백일장과 스피커가 무슨 연관이라고.
대학에 들어가선 기자를 준비하다가 잡지사 에디터로 입사했다. 그랬더니 엄마가 말했다. "신기해. 널 가졌을 때 집에서 하루 종일 잡지를 읽었거든. 그래서 네가 잡지사에 들어갔나 봐."
엄마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우리 딸은 글 잘 쓰잖아."
내가 대답했었다. "내 글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알아?"
그러자 엄마가 말하길, "안 봐도 알아. 무조건 알아."
성장기를 보내면서, 나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불편했던 날들도 있었다. 내가 큰 성취를 이뤄내지 못하면 아빠를 실망시킬 거라고 생각했었다. (학창 시절에 내가 기억하는 아빠 모습은 내 성적표를 보며 무섭게 굳은 얼굴로 한숨을 쉬는 얼굴이었다. 평상시엔 다정한 아빠였기 때문에, 내 성적에 대해서만 차갑게 변해버리는 모습에, 나는 슬프고 무서웠었다.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거나 교우관계가 나빠지면, 아빠가 나를 미워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내가 판사나 변호사처럼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직업을 갖길 바라는 것 같았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나를 가둬놓고 내게 떠넘기려 하는 것 같아서, 10대 시절 나는 내내 아빠랑 싸웠고 불편하게 부딪히며 살았다.
하지만 아빠는 내게 많은 제약을 주는 사람이었던 동시에, 내게 다 허용해주고 싶어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딸이란 이름으로 권력으로, 누구도 (할머니도 큰아버지들도 엄마도) 말리지 못했던 불 같은 성미의 아빠를 내 편으로 만들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아빠는 내가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내 편이었다.
아이를 갖고서야, 내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기대하며 내 이름을 지어놓았을 부모님의 마음을 그려보게 됐다. 그럼 눈물이 흐른다. 내가 아기에게 주고 싶은 사랑은 내 작은 몸에서 온 우주가 흘러나올 만큼 크다. 엄마와 아빠도 그랬겠지? 그리고 두 분은 내게 너무 큰 사랑과 믿음을 주며 살아왔다. 그 사실을 요즘에 다시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