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고 강한 여자

비행기가 보이는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든 생각

by 노르키

남편 생일을 맞아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 묵었다.


지금은 아침 7시, 인천공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조용한 호텔. 나는 한 달 전에 미리 바다가 보이는 방을 빌려두었다. 동쪽으로 통유리창이 나 있어 새벽이면 떠오르는 해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도록 향해 있는 더블 침대. 이곳에 누워 바다를 보면 잠깐 딴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다. 앞에 보이는 바다는 얕고 잔잔하다. 낮은 둑으로 막힌 탓이다. 잔물결이 조용히 반짝이는 바다에선 청둥오리들이 가만히 쉬고 있다. 둑 옆엔 푸른 소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바다와 호텔 사이에는 제멋대로 자란 야생 갈대밭이 있다. 이런 자연스러움과 고요함이 좋다. 지난해 남편 생일과 엄마 생신 때도 여기에 왔었다.


오늘 아침에도 누워서 해 뜨는 모습을 봤다. 공항 근처여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도 꾸준히 보인다. 비행기를 보다가 문득 잊었던 느낌을 떠올렸다. 떠나고 싶다. 지금까지도 영어 공부를 좋아하며 전화영어를 놓지 못하는 이유, 어릴 적부터 영어를 좋아했던 이유는 떠나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부터 간절히 바랐다. 외국에서 살게 되기를,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 머나먼 곳에서 영어로 말하며 일할 수 있기를. 그러나 지금은 외국살이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리만족한다. 얼마 전엔 네덜란드, 과테말라, 영국에서 사는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타향살이의 고단함도 있을 테지만,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안전지대’를 벗어나고 있는 친구들의 삶은 내겐 흥미롭기만 했다.


지금 나는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사는 이 땅, 이 시간과 공간에 감사하면서. 하지만 비행기를 바라보며 설렜던 나의 마음들은 언제 어디에서 서서히 잊혔을까?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멀리 떠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내심 그렇게까지 힘겹게 영어를 공부하기 귀찮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새로운 타국에서 적응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며칠, 몇 달 여행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터다. 그래서 덜 힘든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던가?


인스타그램에는 종종 이직한 지인들의 근황 사진이 올라온다. 정장을 차려입고, 프로페셔널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 다들 자기를 열심히 증명하며 살아간다. 대학에 붙으면 합격증을 올리고, 취업하면 신입사원을 올린다. 이직하면 또 새로운 회사의 사원증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다. 앞의 두 가지는 나도 다 해서 지금까진 괜찮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세 번째 것은 못 해봤다. 어제도 누군가의 사진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왔다. 대개는 겉핥기식으로 아는 지인들이라, 나는 그들의 노고를 모르니 그냥 겉보기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만 볼 수 있다. 다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기도 할 테지만, 그들에게 더해진 새로운 생기를 보면 부럽다. 나도 뭔가 하고 싶다. 내 본성과 야망에 충실해서 하루종일 몰입해도 지치지 않는 그런 일을.

나는 따뜻하고 안전한 유리병에 들어온 느낌이다. 아무도 들어가라고 내게 강요하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상처받은 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남편은 나를 너무나도 사랑해 준다. 남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상냥해진다. 내가 갖고 태어난 다정함이 증폭된다. 이렇게 상냥한 사람으로서 아이의 엄마가 되고 가족의 사랑에서 허우적거리며 평생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하늘을 낮게 나는 비행기를 보며 잊고 살았던 것들을 떠올린다. 나는 아주 무섭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직 기회가 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아도 해낼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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