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르키 Feb 07. 2023

내 머리를 말려준 아빠

임신 23주, 아직도 부모님 앞에서 나는 아이가 된다

어제 아침. 머리를 감고 나온 내게 아빠가 물었다.

“샴푸 몇 번 했나?”

나는 한 번 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빠가 “두 번 해야지.”라고 말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아빠는 내게 샴푸를 꼭 두 번씩 하라고 했다.

그래야 머리가 깨끗해지고 기름기가 없지.”

내가 열한 살까지, 아빠는 내 머리를 자주 감겨줬다. 그때마다 아빠는 샴푸를 두 번씩 해줬다. 남은 거품이 없도록 박박 헹궈줬다. 아빠 손을 거치면 두피가 화끈거릴 만큼 시원했다. 하지만 혼자서 머리를 감을 수 있게 되자, 샴푸는 한 번씩만 했다. 두피가 건조해지는 것 같았고, 지구 환경에도 좋을 게 없어 보였고… 물론 솔직한 마음은 ‘귀찮다 다 귀찮다…’였다. 두 번씩 샴푸 하면 헹구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니까.


어제 아침 머리 말리는 나를 보며, 아빠는 드라이어를 달라고 했다. 내가 말리는 폼이 엉성해 보였던 게 틀림없다.  

“그렇게 한 군데에만 바람이 가게 멈춰 있으면 머릿결 상한다니까.” 아빠는 드라이어를 빠르게 앞뒤좌우로 움직이며 내 머리를 말려줬다. 다시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예전에도 아빠는 그랬다. 천천히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드라이어로 말려줬었다. 반면에 엄마는 손 힘이 셌고, 해야 할 일이 언제나 많았다. 그래서 엄마가 머리를 말려주면 머리와 어깨가 이리저리 흔들렸었다. 물론 엄마가 우릴 늘 씻겨줬고 많이 바빴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냥 좀 살살해줬으면 했을 뿐이었지, 그것 말곤 고맙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순간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다. 아빠와 엄마는 나를 그 옛날처럼, 어린이처럼 바라봐준다.


나와 동생이 아기였을 때 아빠는 퇴근하면 우리 기저귀를 갈고 목욕도 시켰다고 했다. 아기였던 우리들이 토하거나 응가해도, 아무것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얼마 전엔 아빠에게 물었다. "우리 다 크니까 좋죠?" 그랬던 아빠가 "응."이라고 답했다.

"응, 하지만 어릴 때가 더 좋지. 아기 때는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콩나물처럼 갑자기 팍팍 자라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 교복 입을 때도 신기하고. 아이들 키우는 게 제일 행복해. 부모가 안 되어 보면 모르는 거야."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나는 36살이면서 17살, 10살, 7살, 3살, 1살로 잠깐씩 돌아가는 기분이다.


어젯밤부터 중부 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눈 때문에 아빠 출장도 미뤄졌다. 엄마는 보일러를 높이고 떡국을 끓이고 가오리찜과 동태 전을 데웠다. 평일 낮에 따뜻한 방에서 부모님과 옹기종기 모여 떡국을 먹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평일 낮에 가족과 함께 있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을 터였다. 평일 낮엔 일을 해야지, 바빠야지, 밖에 나가야지, 그래야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시지. 하지만 이젠 내가 눕고 먹고 쉬어도 오히려 "더 쉬어."라고 말하는 부모님. 내가 임신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결혼해서 안심하신 것일까, 프리랜서로 조금씩 일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아니면 이젠 잔소리할 힘이 빠지신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부모님과 함께 <미스터트롯 2>를 봤다.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아직 내 나이가 젊어서 다행이다. 사랑한다는 말, 앞으로 70년은 더 해드리고 싶다.



이전 05화 귀에서 들리는 소리의 정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