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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Jan 02. 2024

새해는 오늘처럼

나와 연결된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1월 1일. 낮엔 엄마 아빠가 우리 집에 오셨다. 평소엔 공사다망해 얼굴 보기 어려운 동생도 함께 왔다. 몇 주 전부터 나는 부모님께 연말에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엄마도 연말엔 일이 많았고, 감기도 회복 중이어서 못 오셨다. 그러다 이렇게 새해에 와주셨다. 나는 오전에 연두 옆에서 낮잠 자다가 벨소리를 듣고 벌떡 뛰어나갔다. 남편 말론 오늘 내가 행복해 보였다고 했다. 


부모님은 소갈빗살, 샤인머스캣, 바나나, 커다란 빵 상자 등을 가져오셨다. 아빠가 직접 고기를 다듬으셨다고 했다. 아빠가 잘라주신 갈빗살을 보니 어릴 적이 생각났다. 내가 어릴 적부터 아빠는 우리에게 몇 가지 음식을 직접 해주셨다. 강정, 간장게장, 닭갈비 등. 특히 내가 10대 때는 아빠가 직접 만든 고추장 소스를 닭갈비에 발라 오븐에 구워주셨었는데, 나는 그 닭갈비를 참 좋아해서 아빠가 만들어주시길 기다렸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새해에 별미를 맛 보여드리고 싶어서 미리 석화 두 상자를 주문해 놓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굴찜을 좋아한다. 오늘 새벽에 배송된 상자를 여니, 손바닥만큼 크고 싱싱한 석화가 물에 담겨 있었다. 껍데기가 단단해 날 것으론 열리지 않았다. 엄마는 석화를 씻은 다음에, 솥에 올려둔 찜기에 석화를 쌓으셨다. 10분쯤 뒤에 석화찜 완성! 동생이 장갑을 끼고 솥 앞에 앉아 껍데기를 열었다. 바다 향이 풍기는 훌륭한 맛이었다. 초장도 레몬도 쪽파도 필요 없었다. 남편은 굴에서 치즈 맛이 난다고 했다. 모두 맛있게 드셔서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좋은 음식의 힘은 이렇게 크다. 


나는 버섯어묵탕을 끓였다. 냄비에 무와 멸치를 넣고 먼저 육수를 냈다. 고래사 어묵, 청경채,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숙주나물을 넣었다. 모두 맛있게 드시고 배불러하셔서 뿌듯했다. 


엄마는 내게 "쉬어, 눈 좀 붙여."라고 하셨다. 밥을 먹고 나는 아기 옆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눈 떠보니 어느새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거실로 나오니 우렁각시가 셋은 다녀간 것처럼 집이 반짝거렸다. 낮잠 자는 사이에 엄마가 거실과 화장실까지 다 청소를 해놓으셨다... 싱크대와 세면대에 파리가 앉았더라면 미끄러졌을 것이다. 가스레인지를 둘러싼 벽마저 하얗게 빛났다. 이렇게 깨끗한데도 엄마는 먼지제거기를 들고 바닥을 닦는 중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집에 가야지. 밝을 때 운전하는 게 좋아." 아빠는 우리 집에서 주무시는 법이 없다. 균이가 "장인어른, 주무시고 가세요."라고 말해도, 아빠는 허허 웃으며 차키를 챙기신다. 처음엔 내가 아빠에게 남이 된 것 같아 슬펐다. 하지만 자식인 내가 우리 아빠에게 남이 될 리가 있나. 그냥 아빠의 스타일이거니, 그렇게 생각한다. 남들 눈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아빠는 이렇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고, 자유를 침해받는 것도 싫어하는 자유인. 자식인 우리에게 공작새처럼 늠름하고 화려한 꽁지덮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  


부모님도 집으로 향하시고 다시 셋이 남은 집. 그래도 전혀 쓸쓸하지 않았다. 엄마가 손댄 자리는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고, 아빠가 다듬어준 갈빗살은 프라이팬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오늘도 남편이 고기와 마늘을 맛있게 구워줬다. 유럽상추와 파김치를 곁들였다. 나는 하이볼을 만들었다. 산토리 위스키와 토닉 워터를 1:4 비율로, 얼음을 넣어 온더락으로 마셨다. 배부른 저녁이었다. 


후식으로 귤을 먹었다. 연두에게 맛 보여주니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얼굴을 앞으로 쭉 내밀고 참새처럼 입을 벌렸다. 두 알쯤 줬는데 더 달라는 듯이 짹짹거리며 울었다. 그래서 몇 알 더 줬다. 우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요즘 연두는 소 울음소리를 들으면 입을 삐죽거리며 우는데, 그 모습도 귀여워서 자꾸 장난치게 된다. 귤 달라고 울먹거리는 연두에게 "음머어~' 소 울음소리까지 들려줬다. 미안... 연두가 와앙 울었다. 나는 연두를 안아 올려 달랬다. 어쨌거나 오늘은 연두가 처음으로 바나나와 귤을 먹은 뜻깊은 날이다.


나는 이렇게 세상과 연결돼 있다. 


나 혼자였다면 먹지 못했을 음식을 먹는다. 어부가 저 멀리 남해에서 굴을 채취하지 않았더라면, 배달원이 새벽배송해주지 않았더라면, 새벽배송 서비스가 없었더라면, 부모님이 음식을 가져다주시지 않았더라면, 올해도 할머니가 햅쌀을 보내주시지 않았더라면... 내게 만금을 주더라도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굴을 따지도 못하고, 새벽배송하지도 못하고, 봄에 모내기하지도, 가을에 수확하지도 못한다. 


새해 첫 하루. 나는 보이지 않지만 나와 연결된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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