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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Apr 29. 2020

아프리카의 눈물?

가슴을 치면서 쓰는 글.

수십 년 동안, 자선단체들은 캠페인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극심한 고통과 궁핍을 앞세워왔다. 빈곤 포르노라고 이름이 붙여진, 가난에 빠진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들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지갑을 열게끔 해온 것이다. 이는 인간성의 친절에 호소하기에 유용한 수단이지만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저하시키는, 이롭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방법이다.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는 80년대 초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1년, 당시 덴마크 자선단체의 이사였던 조르겐 리스너는 신문을 통한 모금 운동에 굶주린 아이들의 모습을 '소셜 포르노'라 칭하며 규탄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이는 인간의 몸, 고통, 슬픔 그리고 두려움을 카메라에 무분별하게 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야말로 Poverty Tourism이었다. 아직도 마음에 눈물이 흐른다.


이후 40년, 과연 빈곤 포르노라는 것은 과거의 것일 뿐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나는 2018년 5월 경 본 에드 시런이 출연해 그야말로 'poverty tourism'을 보여준 비디오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외국에서도 이미 많은 비난을 받았던 비디오라 자료를 찾기는 어렵지만 사진만 봐도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게 희생자를 구하러 오는 백인 슈퍼맨을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비디오가 Norwegian Students' and Academic's International Assistance Fund의 펀딩 캠페인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유죄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왜 자선단체들은 빈곤 포르노를 계속해 사용하는 것일까? 주된 이유는 적어도 단기적으로 그들에게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충격적인 이미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더 많은 돈을 끌어오기 마련이다. 쉽게 팔린다. 이는 심지어 우월감마저 느끼게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는 잘못된 관념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빈곤 포르노를 사용하는 캠페인은 빈곤의 뿌리 깊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상황과 개인의 경계를 허물며 장기적으로는 득 보다 실이 많다. 그저 우리로 하여금 소액의 돈으로 그 이미지로 얻은 죄책감이 사라지게끔 할 수 있다는 환상만 심어줄 뿐이다. 빈곤은 구조적 문제, 발전의 복합성, 정치적 의지, 교육의 미비 등 여러 복합적인 문제로 야기된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대개 자선단체들은 긴급하고 신속한 해결이 필요한 인도주의적 위기나 자연재해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자선단체의 최종 목표인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는 달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대중은 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는 단순히 기부 버튼을 클릭하는 것보다 더 오랜,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자의 카메라에 담긴 소년을 위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의 이미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결국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는 것에 익숙해져 결국 무감각해지기에 이른다. 짧은 연민만을 느낄 뿐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일종의 면역이 쌓이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쌓이고, 고통을 표현하는 이미지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로서 치부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체념을 한다. 이는 원조의 효과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졌고, 각 나라의 국민들은 제3세계로의 국가적 차원의 지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기부들이 정말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7년 동안 낸 월 3만 원의 돈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1년 세계은행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42%가 절대적 빈곤 속에서 살았지만 2013년까지 이는 10.7%로 줄었다. 이는 약 10억 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절대적 빈곤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발도상국에서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산층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자선단체들의 캠페인이나 관련 미디어가 대중으로 하여금 이목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0.7%의 사람들은 여전히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무력감과 피로감을 초래하고, 나아가 일부 사람들은 완전히 외면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자선단체들이 개발도상국에 대해 매우 일방적인 모습을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이러한 극빈층의 이미지는 사람들이 개발도상국 하면 떠올리는 유일한 이미지가 된다. 제3세계 국가들은 자연재해나 전염병 사태,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한다. 이는 어떻게 이러한 편협한 시선들이 후진국의 모든 사람과 인생을 대표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실제로 2012년에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라는 여론 조사에서 총 1295명의 조사 대상자 중 55%가 기근과 빈곤 관련된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2002년 같은 조사에서 80%가 같은 대답을 한 것에 비해 나아진 수치이지만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이러한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을 무시할 만한 수치는 아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미래에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들의 손으로 바꿀 수 있다. 그들 또한 같은 인간이라는 것, 내 조카와 다름이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


무기력한 사람들?

빈곤 포르노에서 나온 한 가지 고정관념은 가난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미래의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 달려있다'라고 믿으면서 매일을 가치 있게 살고자 노력하지만 과연 가난한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까, 제3 국의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를 할까, 생각해볼 때 과연 고개가 끄덕여지는가? 실제로 세계은행에서 한 조사에 따르면 은행 직원의 20%가 '가난한 사람들은 미래가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그 대상자,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했을 대 무려 80%에 이르는 사람들이 미래는 나에게 달려있다고 응답했다.


빈곤 포르노는 우리의 관념을 고정시켜옴과 동시에 공감과는 멀어져 왔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3세계 국가의 극빈층이 직면하는 어려움에 공감할 수 있을까? 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질까? 우리는 과연 '우리'와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불평등으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질문 가운데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늘 침묵하는 피해자

우리는 종종 무엇인가를 제공한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간과하곤 한다. 자선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부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하느라 수혜자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 떠오르는 자선단체의 광고를 생각해보자. 누가, 어떤 스토리를 말하고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워 보이는 셀러브러티들이 진중한 목소리르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움을 호소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우리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빈곤 포르노를 이용한 캠페인은 수혜자가 내레이션을 하는 일이 없다. 수동적인 피해자라는 모습을 더한다. 만약 수혜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말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표현하고 묘사하는 데에 통제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너무 흔하다. 희생자로 묘사하며, 그들에게 해결책을 묻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 아 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선단체들은 점점 대중들에게 죄책감을 주기보다는 영감을 주고, 인간적으로 비하하지 않으며, 상황과 개인을 분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도 큰 몫을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아프리카를 한 대륙으로만 치부하지 않으며 그들의 독특한 패션과 타고난 재능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에 나오는 이미지만 봐도 그러한 나라들에 대한 매우 다른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 또한 고정된 관념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빈곤 포르노를 접하고 있다. 물론 대중에게 빈곤의 실체, 그들의 실상을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선 단체들은 더 이상의 질이 나쁜 캠페인 대신, 수혜자들이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며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캠페인 및 콘텐츠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음악, 음식, 패션 등과 같은 친숙한 장치를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알 방법이 없는 인간의 인생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게끔 하고 이로 인해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그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가난'으로만 치부되지 않게끔 해야 한다. 단순한 거래 이상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단순히 희생자, 피해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때 사람들은 그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며 단순한 동정보다 공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또한 가난의 본질에 대해 더 알게 하며, 관련된 활동에 더욱 관여하게끔 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맥락과 개연성 없이 빈곤만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주체가 되는 사람들의 의견 없이 그들 인생의 일부만을 팔아 사람들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방법은 도저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문제들에 대해 토론을 하고, 원인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수혜자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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