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세공과금이 맺어준 선물
자폐 친구들은 먼저 관심분야를 만들고,
그 분야를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게 하세요.
- 템플 그렌딘 -
화섭 씨에겐 다양한 가족이 있다. 형과 둘째 누나는 결혼해서 형수와 제부와 조카들이 있다. 하지만,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과 자폐의 특성상 결혼으로 확장된 가족들과 교류하는 건 서툴다. 친형제 외에 사촌누나도 있다. 나랑 동갑인 사촌 J는 늦게 결혼해서, 용감히 출산해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다. 착한 J는 화섭 씨에게 친절하지만, 화섭이는 J의 남편이나 아들과 어울리진 않는다.
그런데, 이런 화섭 씨가 J의 아들에게 외삼촌 노릇을 할 기회가 생겼다. (친척 용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아시는 분 댓글 부탁드립니다.)
화섭 씨의 삶의 낙은 경품과 복권이다. 몇 주전, 공기청정기가 당첨되었다. 그런데, 이걸 타려면 제세공과금을 내야 한단다. 삼십만 원 정도 되는 청정기의 제세공과금은 칠만 원이라고, 화섭이는 자기 잔고가 얼마 있다고. 돈이 얼마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기 청정기는 우리 집에 이미 있다. 몇 년 전에 이미 화섭이가 경품으로 타 온 것이다. 난 다섯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는 사촌 J 가 생각났다. 톡을 넣어봤다.
" J야, 화섭이가 L사 공기청정기 디자인 예쁜 거 당첨되었대. 제세공과금 칠만 원만 내면 가져갈 수 있대. 너 혹시 쓸래?"
J는 아들을 생각해 그러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동생에게 이야기하니 알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J의 나이도 물어보고, J의 아들의 나이도 물어본다. 평소엔 관심 하나 없던 녀석이다. 자기가 공들여 탄 경품이 그 집으로 가니 그걸 쓰는 사람들의 정보가 궁금한 거다. 화섭이는 독특한 습관이 있다. 경품에 하도 관심이 많다 보니 자기가 그걸 못 타도 당첨 명단에 나온 사람들의 대략 주소를 외운다. 무슨 시에 사는 아무개님이 무슨 선물을 가져갔다는 정보 말이다. 근데, 그 대상이 사촌 J 가 되었다.
J의 나이는 누나랑 동갑이고, 아들 아무개는 다섯 살이야.
아, 그래~
히죽 하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J에게 연락해, 제세공과금을 화섭이 통장으로 이체해달라고 부탁했다. J는 인심이 좋아 용돈 십만 원을 얹어 십칠만 원을 이체했다고 한다. 내가 옆에서 화섭이 좋겠다~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다음 날 저녁 퇴근하니, 화섭이가 자기 폰을 보여준다. 경품 이벤트 담당자의 문자가 왔다. 경품을 받을 주소와 연락처,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을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경품 당첨에 흥분이 되어, 자기 주민등록증까지 찍어 문자로 알뜰히 보내준 화섭 씨. 주소는 J네로 해야 하는데, 너무 급하게 해서 쌍문동 우리 집 주소로 답장해놓았다. 제세공과금은 육만 원대인데 그건 잘 이체해놨다.
"화섭아, 주민등록증을 이렇게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안 돼. 개인정보는 소중해."
한바탕 잔소리를 한다. 아~ 그래. 쑥스러워하는 화섭 씨.
"이벤트 담당자 전화번호 좀 알려줘. 누나가 주소 정정해달라고 할게."
다음날, 주소 정정 부탁 문자를 보냈다. 담당자에게 확인 전화가 왔다. 이제 청정기는 J네 집으로 출발했다.
그날 저녁, 해가 지자 화섭이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청정기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궁금한 거다. 엄마에게 대신 전화로 물어봐달라 한다. 내가 엄마 바쁘니 직접 전화해보라 했다. 전화하고 받자마자 급히 물어보는 화섭 씨.
"J누나, 공기청정기 왔어?"
"아니.. 아직 안 왔는데.."
아.. 그래.. 화섭이는 전화를 끊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J에게 톡이 온다. 화섭이 전화 끊고 바로 도착했다고. 예쁘게 설치된 청정기 사진을 보내준다.
"J야, 제세공과금이 칠만 원이 아니라 육만 원이래. 화섭이 데리고 청정기 보러 갈게. 가서 돈 많이 받았으니, 화섭이에게 자장면 사라고 할게. 열심히 경품 응모해서 외삼촌 노릇 잘했네."
화섭이에게 청정기 보러 가자니 싫다는 소리를 안 한다. 평소 가전제품 전시회를 즐겨 찾는 화섭 씨니 무슨 명품 작품 보러 가는 것과 같은 거다. 외삼촌 노릇에 대한 칭찬이 싫지 않은가 보다.
경품으로 화섭 씨는 세상과 연결된다. 복권도 매주 사는데, 당첨되면 가족과 나누겠단다. 맘이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