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우리 동네 八日市(요카이치) 사람들, 첫번째

by 아초




좋아서 이사를 오고, 어쩌다보니 카레 가게를 운영하며 하하호호 추억을 쌓아가고 있는,

애정하는 우리 동네 八日市(요카이치).


교토에서 차로 50분, 근처 큰 도시에서도 거리가 먼 소도시인 요카이치의 최고의 호황기는 60~80년 전. 그 시절에는 이곳이 교통의 중심지였고, 경제 활동도 활발하고 인구 수도 많아서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다 할 유명한 관광지도 없고, 말만 하면 다 아는 유명한 음식도 없고, 지역 캐릭터도 딱히 없는,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고 한적한 시골 동네인 이곳.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는 중이다.




나의 두번째 브런치 북의 테마로, 이곳에서 만난 재미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내보려고 한다.


최근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일본의 레트로 문화. 그것을 말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銭湯(센토:목욕탕) 문화다. 장작으로 불을 떼 온탕의 물을 뜨겁게 데우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오래된 목욕탕인 센토는 이제는 거의 사라진 한국의 옛날 목욕탕처럼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센토 안 온탕은 보통 두세 개에 좁은 냉탕이 하나 있고, 들어가면 뼈가 찌릿찌릿한 전기탕이나 미세한 거품이 나오는 나노버블탕, 센 수압이 나오는 마사지탕이 있는 곳도 가끔 있다. 센토라고 하면 밝은 하늘색의 타일이 벽과 바닥에 깔린 모습이 일반적인데, 큰 벽면 한쪽에 페인트로 그린 후지산이나 그 지역의 자연풍경, 탕 내부에는 금붕어나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90년대 즈음 태어난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목욕탕에서 나와서 마시는 미에로 화이바. 일본 센토에도 그것처럼 목욕 후에 마시고 싶어지는 매점의 병주스가 있다. 우리 동네 요카이치에서 만난 친구 N짱은 '南山鉱泉所' 라는 이름을 걸고 일본 전국의 센토에 병주스를 만들어 납품하고 있다. 그녀가 가장 오래 만들고 있는 제품은 메론소다와 미깡수이(귤물), 히야시아메(생강 베이스)인데, 모두 달달한 맛이다. 레시피는 옛날부터 만들어 오신 한 사장님의 것을 물려받았다.




그런 N짱이 처음부터 병주스 사장님이었던 건 아니다.


센토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N짱은 대학 시절 교토에 있는 센토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우후죽순 생겨나는 슈퍼센토(우리나라로 치면 대형 찜질방이나 사우나 시설)로 지역의 센토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그 센토에 납품을 하던 병주스 회사의 사장님께서 제조를 그만두신다는 소리를 들은 게 계기였다.


'센토의 병주스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센토들도 연명할 수 있지 않을까?'


N짱은 사장님께 병주스 사업을 잇고 싶다고 당차게 어필하여 그 역사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가 된 것이다.


기계가 오래되어 일단은 가내 수공업으로 시작한 N짱의 병주스 사업. 처음에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지금은 기계와 시스템을 개선해 대량 생산도 가능해져서 병주스 이외의 새로운 제품들의 발주도 받는 위치가 되었다.





N짱이 센토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은 그게 다가 아니다.


예술을 전공한 N짱이 메인으로 시작한 일은 페인트공인데, 주로 가게의 간판과 트럭에 디자인된 문자나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 연장선으로 그녀는 센토의 타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큰 벽에 올라가 묵묵히 준비한 그림을 그려내, 오래된 센토들의 벽을 생기 있게 바꾸는 N짱의 발자취는 취재도 여러 번 받았을 정도로 마니아들과 그 지역에서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프리랜서로 전향해 대형 벽화를 의뢰받기도 했고, 음악 이벤트에서 라이브 페인팅을 선보이기도 하는데 그녀의 그림은 정말 멋지고 위트가 있다.


그 외에도 센토를 사랑하는 N짱은, 우리 동네에 딱 하나 남아있는 센토 '延命湯(엔메이유)'의 청소와 관리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고, 센토를 지키고 싶은 젊은 사람들이 모인 지역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오래된 곳의 타일 보수나 운영 전반에 관여하고 있기도 하다.





센토 말고도, N짱이 사랑하는 일본의 오래된 문화 중에 재미있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일본의 쇼와 시절을 대표하는 '오래된 극장의 스트립쇼'.


N짱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친구들과 스트립쇼를 보러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보수적인 한국인 여성인 나는 '뭐? 스트립쇼?' 하며 화들짝 놀랐었다. 쇼가 끝난 후에는 천 엔 지폐를 접어 스트립퍼의 몸에 꽂아 주기도 하고, 같이 사진을 찍고 인화해 주는 포토타임도 있다고 했다. 그녀는 스트립쇼 문화도 이제는 거의 사라져 스트립 극장도 전국에 몇 곳 남지 않아 슬프다고 했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극장은 더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나는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N짱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오래된 네온사인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극장의 분위기, 여성의 몸의 아름다움을 눈앞에서 라이브로 볼 수 있는 신선한 재미, 그 문화를 이어가는 스트립퍼들에 대한 존경심.. 그런 사라져 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N짱은 시간이 나면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일본 방방곡곡으로 스트립 극장을 찾아 꾸준히(?) 스트립쇼를 보러 다닌다.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녀의 대답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다'는 것.


늘 수수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본인의 일을 멋지게 이어가는 동갑내기 N짱을 보며,

결국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고,

꾸준한 사람들은 머릿속에 잡생각을 들일 틈도 없이 오늘도 그냥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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