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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현 Jan 16. 2024

3.더뉴그레이의 탄생

3-1 취업하고 먹고 살아야지 일단

 사업이 정리 되어가던 시점에 공유오피스 위워크에서 무료로 자리를 지원받게 됐습니다. 사업 지원을 해주신 거지만 난 위워크에서 수학 과외 자료를 준비했죠. 저녁과 주말에는 꽉꽉채워서 6명의 학생 수학과외를 했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취업 준비를 했습니다. 다시 사업을 할 자신은 없었거든요. 외국계 취업 스터디, IT 관련 스터디를 만들어서 취업에 필요한 일들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블록체인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블록체인 관련 공부를 깊게 하기 시작했구요. 블록체인 기술을 분석하는 개인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관련 회사 취업에 성공도 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갔던 회사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캠"(사기 코인)인 회사였어요. 홈페이지에는 화려한 개발진들이 포진해있었지만 회사 어디에도 개발자는 없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마케팅 직책 또 한 어이가 없었죠. 단톡방에서 우리 회사를 비방하는 이들을 쫓아내고, 반대로 그들을 비난하는 일이었습니다. 커뮤니티 관리가 해당 업계에서는 너무 중요한 일이었거든요. 삼성 인턴이후로 어찌보면 첫 정규직 취업인데 위험하고, 엉망인 최악의 회사였습니다. 앞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한 이유가 이거에요. 만약에 꿈의 직장에 내가 입사했다면 다시 창업이라는 꿈을 꿨을까요? 아닐 겁니다.


3-2 얘들아 우리 딱 100명만 바꿔볼래?

 다시 위워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헤어졌던 옛 팀원 몇 명을 불러모았어요. 다시 한 번만 더 해보자. 각자 아르바이트나, 회사 생활하고 저녁 그리고 주말에 모여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직도 그 때가 눈에 선합니다. "동화 속에 온 것 같다" 첫 번째 아저씨가 느꼈던 그 감정을 더 많은 사람에게 한 번 전달해보자. 평범한 아빠들의 패션을 변신시키는 프로젝트를 해보자. 딱 100명만 하면 분명 어디선가 우리를 찾아줄거야. 이름은 새로운 중년을 뜻하도록 "THE NEW GREY"로 하자.

 그리고 각자 흩어져서 팀원 친인척 분들에게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이모부, 동네 아저씨, 그리고 친구 시아버지까지요. 큰 캐리어에 한 가득 옷을 싣고 ,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 산넘고 물건너서 메이크오버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한 분 두 분의 비포에프터 사진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반응이 있었지만 이 것으로 뭘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어요. 


3-3 한 줄기 빛 : 크라우드 펀딩 

 뭔가 목적성을 잃어갈 때 쯤 광고 하나를 보게 됐어요. "와디즈"라는 크라우드 펀딩 회사에서 "소셜임팩트"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를 지원해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거다 싶었습니다. 우리 이거 해보고 이것도 반응없으면 접자. 마지노선이었습니다. 

 크라우드 펀딩을 위한 상세페이지 내용의 구성은 대영이 그리고 남건이가 도와줬어요. 한 자 한 자 우리가 대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정성스레 남겼고, 그 동안 우리가 쌓아온 아저씨들의 비포에프터 사진을 남겼습니다. 일반적인 크라우드 펀딩을 위한 상세페이지와는 거리가 먼 우리의 진심을 적어놓은 일기에 가까웠죠. 제목은 "우리 아빠 프사바꾸기 대작전" 우리 자식들이 아빠들의 등산 사진, 아이콘 사진, 화초 사진을 바꿔놓자라는 귀여운 프로젝트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대망의 크라우드 펀딩 오픈일이 다가왔습니다. 정말 떨렸어요. 사실 자신이 없었어요. 대체 어느 누가 이 걸 돈주고 할까? 아빠들이 옷 입고 촬영하는 걸 좋아나할까? 아무도 펀딩 안하면 어떡하지?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10분만에 우리가 준비한 수량이 솔드아웃됐고, 요청이 쇄도해서 추가로 20명 정도를 더 받았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알아주는구나. 안도의 눈물이 또르륵 흘렀습니다. 

 잔뜩 긴장했습니다. 촬영 스케줄을 잡고 키, 몸무게 등의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수백 곳의 거래처에서 가장 잘 맞을 법한 옷을 고르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33명의 아버지와 before 사진을 찍고, 헤어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을 직접 입혀드렸습니다. 배나오고 , 머리빠지고, 매일 같은 옷만 입는 우리 아빠들이 멋진 옷을 입고 짠하고 바뀌었죠. 촬영을 마치고는 그 분들의 인생 이야기를 하나 하나 귀담아듣고 기록했습니다. 사진촬영도, 나에게 주목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도, 젊은친구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모두 다 어색해하셨습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하셨지만 어느새 30년전 청춘으로 돌아간 본인을 마주한 순간, 또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가족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진심을 다해 열심히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마음이 전달되었나봐요.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정이 들더라구요. 아쉬워서 울면서 헤어지기도 했구요. 우리 팀 고생한다며 사다주신 충무김밥, 호두과자, 빼빼로 데이 응원선물, 어떤 분은 점심 사먹으라며 용돈을 쥐어주시던 분도 계시구요.

 아빠들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는 후기가 줄을 이었어요. 어떤 분은 액자로, 심지어 어떤 분은 족자에 본인 사진을 담기도 하셨습니다. 더뉴그레이는 그렇게 아저씨들에게 청춘을 돌려드렸습니다.평생 아버지라는 무게감 때문에 "나"보다는 "가족"을 위한 선택만 해왔던 그가 처음으로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펀딩은 대성공이었지만 심하게 적자가 났고, 제 개인 사비로 메꿔야 했습니다. 250,000에 옷(자켓,셔츠,바지,신발)을 제공하고, 헤어메이크업 그리고 사진 파일을 드리고 마지막은 이 분들의 사연을 모아서 잡지까지 제작해서 드려야 했거든요. 다시 생각해보면 참 바보같습니다. 바보여서 실행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같아요.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의지를 갖고 한게 아니라 적자를 볼 줄 몰라서 시작했던거에요. 후회하냐구요? 아니요. 그 때의 바보같은 선택에 늘 감사하고 있어요.


3-4 가난한 콘텐츠 회사에 뉴발란스 광고가 들어왔다.

 당시 메이크오버 일을 함께 도와줬던 대륜이 주변의 광고 업계 사람들이 하나 둘 연락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BMW MINI 광고를 받게 됐습니다. 액수가 크진 않았지만 영광스러운 첫 포트폴리오였습니다. 그 뒤 지금의 더뉴그레이를 있게 만들어 준 그 프로젝트 바로 "뉴발란스_ 아빠의 그레이"를 만나게 됩니다. 2000여명의 신청자 중 20명의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더뉴그레이 스타일의 패션에 뉴발란스 신발로 마무리한 20명의 아버지 비포어에프터 사진은 그 해 모든 광고 캠페인 중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인정 받게 됐고, 더뉴그레이를 세상에 알리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호기롭게 100명만 딱 하면 세상이 우리를 알아줄거야라며 시작했던 더뉴그레이 프로젝트가 정말로 100명을 하고났더니 우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뉴발란스 프로젝트가 워낙 센세이션 했던 터라 기업 광고 문의가 쇄도했어요. 이제서야 숨 좀 쉬게 되나 했죠. 역시 방심은 금물이라던가요.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3-5 바버샵 두 번째 실책

 와디즈 크라우드 펀딩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되면서 바버샵과 연결고리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남자들의 메이크오버 공간으로 바버샵만 한 곳이 없었거든요. 처음에는 제휴 형식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다가 하지말았어야 할 동업을 하게 됩니다. 저는 콘텐츠를 하고, 이발 명장이었던 바버샵 원장님, 그리고 화장품 사업가 이 조합이라면 환상적이겠는데?? 바버샵을 메이크오버 서비스, 의류 판매, 화장품 판매까지 하는 남성 토탈 그루밍샵으로 만들고 전국 체인화를 해야겠다 아주 야심찬 동시에 어리석은 판단을 했죠. 돈은 안 벌리는데 오프라인샵이니 목돈이 묶이고, 매 달 월세에 이발사들 월급에 원장님께 드려야하는 로얄티, 매장은 늘어가는 데 점점 적자 폭이 커졌죠. 겉으로는 잘 나가는 사업처럼 보였겠지만 실상은 적자에 허덕이는 사업가, 아니 사업가라기보다는 수학 과외 선생님이었죠. 수학 과외가 본업인 게 맞았습니다.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었어요. 너무 많은 이해관계자, 너무 많은 돈이 걸려있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어요. 과외로 메꾸고, 들어오는 광고 프로젝트로 돈 벌어서 메꾸는 수밖에요. 


3-6 코로나 때문에 망했다는 핑계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모든 광고 프로젝트, 몇 억원의 가계약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아득해졌어요. 오프라인 샵인 바버샵은 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손해가 극심해졌고, 또 한 번 기브업을 해야하는 상황이 왔어요. 카페 망했을 때를 답습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바버샵을 정리하면서 동업자들간의 갈등도 심각했고, 그 화장품 사업가와 다른 관계자는 소송까지 하게됐죠. 저는 그 화장품 사업가에게 소송을 걸지 못 했어요. 변호사비도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모든 걸 다 최대한 빨리 털어내고 싶었어요. 그렇게 코로나라는 좋은 명분덕에 덜 챙피하게 두 번째 사업이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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