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디어 마이 프렌즈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모든 드라마를 다 보진 않는다. 사람사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정과 사랑과 희로애락을 즐긴다. 내가 세상의 모든 이들을 만날 수 없기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통로이기도 한다. 고현정이란 배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노인들이 나오는 드라마라서 더 관심이 갔다. 상업적인 드라마는 젊은 인기배우, 사랑, 권선징악이 예로부터 빠지지 않았다. 쉽게 예상가능한 드라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다 막장은 더더욱 아니다.
딸의 시선으로본 늙은 친구들. 우리의 부모세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최선의 존경이라 믿는다. 길 위에서 죽는게 꿈이라던 늙은 친구들. 나는 그들을 통해 인생에서 무엇하나 크고 작은일이 없음을 배운다. 난희와 영원의 암도, 희자의 치매도, 정아의 남편에게 오래시간 맞아왔던 소중한 딸의 미국행도, 그리고 죽음도 삶과 다르지 않음을 배운다. 아주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결국 길 위에서 죽자하고 떠난 여행과 함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죽음앞에서 어떤 일이 더 심각할 수 있겠는가. 그 심각한 죽음앞에서 여행을 결심한 노인네들의 이야기는 죽음마저도 즐거운 우리네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일수 있게끔 한다.
세상 모든 자식들은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 우리 다 너무 염치없으므로
처음 마음을 움직였던 대사다. 노희경작가의 대사는 어느하나 버릴 것이 없지만, 눈물을 죽죽 흘리며 나를 보게 했던 대사는 이 부분이었다. 치매걸린 엄마앞에서 우는 아들, 암 선고를 받은 엄마를 향한 딸의 마음이 바로 이 대사였다. 세상 모든 자식들은 눈물흘릴 자격도 없다. 미안하다 말할 자격도 없다. 그게 자식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자식들이다. 그중에 하나인 나는 염치없지만 눈물을 흘리고, 염치없지만 미안해 했다. 부모를 향한 애틋한 자식들의 사랑이 그대로 느껴지지만,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을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부모앞에서 숙연해야 하는 우리이지만, 그렇지 못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마음으로 부모를 향한 애틋함과 존경을 담을 수 있게 하는 장면 이었다.
숙연함, 우리는 그것을 왜 잃어버렸을까. 유엔묘지에 가서 공휴일날 묵념하면서 숙연함을 찾는 우리는 정작 부모앞에선 숙연함과 존경을 찾을 수 없다. 가끔 연예인들의 뉴스를 한껏 떠들며 그들의 잠자는 습관까지 읊어 대는 친구에게 나의 잠자는 습관은 알고 있느냐고 ... 그렇게 말하는 때가 있다. 마찬가지다. 전쟁군인들의 숙연함은 아는데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부모에 대한 숙연함은 알고 있느냐고 ...우리 스스로에게 그것을 묻고 있는 거다.
자식은 언젠가 부모가 된다. 부모는 다시 자식이 될 수가 없다. 그걸 핑계삼아 우리는 자식이 될수가 없는 부모를 향해 나도 언젠가 부모가 된다는 자신감하나로 큰 소리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지나온 자신의 삶에 계속 채찍질을 하시는 부모앞에서 ....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왜 나는 지금껏 그들이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살아온 것처럼 ,어차피 처음에 왔던 그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 길도 초라하지 않게 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너무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고 있는데 ...
완이의 마지막 나레이션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노인은 끝이 아니다. 늙으면 늙을수록 더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갈 힘이나는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순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삶의 연속이다. 희망없는 것을 향해 가고 있다면 현재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보다 더 큰 희망을 향해 가고 있기에 지금 내 인생은 가장 가치있다.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는 것
지금 이순간의 가치 , 그것을 알려주기 위한 작가의 마지막 메세지는 더 힘이 있다. 오래 지속시키고 싶은 순간이 더 많아지는 것,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다.
미래는 곧 현재가 되기때문에 현재를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다가 올 오늘을 위하 가장 큰 준비는 지금 이순간을 잘 살아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