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혜인 Jan 28. 2019

묵묵히 걸어온 사람

J의 아버지와 함께한 저녁식사

@kku


유학원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점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이르면 10대 중반, 늦어도 10대 후반의 아이들이 외국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돕는 일이다. 아이가 지원하는 학교에 합격하면 몇몇 부모들은 대표님과 나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었다. 그건 일하며 느꼈던 또 다른 소소한 행복이었다.


 한날은 J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 약속 장소는 가까운 레스토랑이었다. 30분 일찍 나오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차가 너무 막히는 것이었다.


 “네, 아버님. 저희 곧 도착해요. 죄송해요. 차가 너무 막혀서요.”




 고급 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말쑥한 차림의 웨이터가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만난 J의 아버지는 정말 기품 있는 신사처럼 멋진 모습이었다. J의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도 아닌 IT 회사를 세우고 사업가로 성공했다.


 자신의 길을 닦는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만큼 고된 일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길을 닦아온 사람에게는 특별한 기운이 있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여유가 있다. 그렇기에 너그러운 성품은 더욱 돋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어떤 틀에 가두지 않는다. 그건 글로만 읽었던 성공한 사람의 자질이었다. 어쩌면 그건 수많은 시간 동안 쉼 없이 자신과 대화하며 선택의 갈림길을 걸어온 자만이 품을 수 있는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J의 아버지는 최근 오토바이를 하나 장만하셔서 배우고 친구들과 즐기러 다닌다고 했다. 늦은 밤 서울 한복판을 달리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


@kku


 그러다 J의 이야기가 나왔다. J는 지금 미국에서 기숙사 학교에 다니고 있다. J는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아이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 여러 지원을 해주고 있다. J를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어렸을 때 남부럽지 않게 많은 지원을 받고 자랐다. 공부도 꽤 잘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자 그것은 옛말이 되었다. 수학 때문에 성적이 확 떨어진 것이다. 수학은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수학을 정복하자는 마음으로 이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수학 선생님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수능 전 마지막으로 치른 수학 모의고사 성적은 30점이었다. 그때 수학 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를 놓아버렸다.




 수학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잃어버린 후에는 한동안 끝없는 방황을 했다. 그러던 중 애니메이션에 빠져 살던 한 친구와 PC방에 처음으로 갔던 적이 있다. 친구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안 나는  드라마를 보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드라마에 흠뻑 빠져들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그동안 끈질기게 괴롭히던 번뇌나 불안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눈물 콧물 다 뺄 만큼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면 참 재밌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야기에 빠져 있으면 나를 자꾸만 헷갈리게 하는 고민과 괴로움을 떨쳐낼 수 있을 테니까.


 그 마음을 품어온 지 벌써 9년이 지났다. 아직 구체적인 성과는 없다. 그 사이 학교도 졸업했고, 취직도 했다.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꿈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마음이 아플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건 아직 나의 여정이 끝나지 않아 느끼는 아픔일 것이라고 믿어왔다. 나의 꿈은 확실히 현재 진행형이다.


 음식에서 잠깐 눈을 떼고 J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웃으며 뭐라고 말하는 눈가에 주름이 진다. 그는 늙지 않았다. 그 주름은 그가 살아온 지난 세월의 흔적이 아니었다. 주름이 내게 그는 지금까지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