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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PI May 09. 2022

배우는 삶에 대하여

못 난 놈, 난 놈, 된 놈, 못 된 놈 나는 어떤 놈인가


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가 무조건 멈추게 되는 프로그램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프로가 몇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동물의 세계다.

언젠가 운 좋게 아프리카 코끼리가 인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두 코끼리가 만나면 귀를 나비처럼 펄럭이고 서로 눈을 마주해 이마를 문지르며 나팔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 huchenme, 출처 Unsplash

그전까지 나는 코끼리를 굉장히 우둔한 동물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인사하는 장면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코끼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인사(人事). '사람의 일'이라는 말이다.

인사라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쉽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초적인 예절문화로 결코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여기 두 경우를 비교해 보자.

a) 상황에 맞추어 인사를 잘하는 품격 있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진심과 배려심,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

b) 하는 둥 마는 둥 껄렁거리는 불량한 폼으로 인사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거리감과 혐오감, 경멸심을 느낄 수 있다.

유기적으로 같은 두 인간과 처음 만난 것뿐인데도 우리는 전혀 다른 것을 찾아낸다.

이렇듯 인간은 나는(born) 것이 아니라 되는(be come) 것이다.​

누구나 나고 자라 사회에 나오지만 사회에 있는 인간들이 누구나 된 놈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나 역시 못된 놈으로 꽤 오랜 시간 살아왔음을 뉘우치고 있다.

내가 못된 놈이라면 된 놈이 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은 못된 놈에서 잘 된 놈으로 변할 수 있을까?

교육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 스스로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느껴야 한다.​

값비싼 과외를 받아도 무서운 선생님을 만나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공부를 할 이유와 흥미가 없으면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교육보다 먼저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반성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집에서, 학교에서 반성문을 써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반성은 누가 시켜서 하는 반성이 아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반성해야 진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성(反省). 돌이켜 살핀다는 말이다.

자기가 지나온 길을 돌이켜 찬찬히 살펴보자.

정말 찬찬히 살펴야 한다.

물결이 인 호수 안을 살필 때처럼 잔잔해지길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불만족한다.

생각 속의 자신과 실제 자기 모습의 괴리감에 구역질이 날 수도 있다.

혹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로, 똑바로 보아야 한다.

나는 어설픈 사람이라 그런 역겨운 모습을 보고 나서야 변화가 일어났다.

생각으로 보던 나와 실제 나의 거리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노력해도(노력이라는 말을 쓰기에 부끄럽지만) 되지 않던 대부분의 일들이

잘 세워진 도미노가 하나하나 넘어지듯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그 뒤로 나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됐다.

드디어 못된 놈에서 된 놈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간 나를 억압하고 제한하던 사슬들이 술술 풀려 끝내 끊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목표한 자신이 되기 위해 안 하던 짓들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정한 반성을 했다고 해서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변화가 시작된다.

제한도 없으니 한계 역시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진정한 자유가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내가 내 삶을 사는 기분.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폴 브루제가 한 말이다.

이 말을 처음 보고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은 한계가 있지만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은 무한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대학교에 가면 공부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은 아이가 있었다.

선생님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를 앉혀놓고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반 아이들이 그 얘기를 듣고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사색이 되는가 하면 몇몇 애들은 눈물까지 흘려서 그야말로 분위기는 초상집이었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하기 싫은 공부를 죽을 때까지 해야 된다는 말에 지레 겁을 먹고 공포를 느낀 것이다.

공부는 싫은 것이 되면 안 된다. 공부는 배고프면 알아서 찾아먹는 식사 같은 것이어야 한다.

​​

몇 년 전 문득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충동에 달린 것을 시작으로 어느덧 3년째 규칙적으로 달리고 있다.

그다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달린다던가 운동을 하고 싶어서 달린다던가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달리고 싶었고 지금도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달리기는 뜻하지 않게 내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이야기하도록 하고)

세상은 역시 묘한 곳이다.

달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궁금해하지만

러너들도 달리는 중에 만나면 당연히 인사를 나눈다.

내가 초보 러너이던 시절의 (여전히 초보의 입장이지만) 이야기다.​


나는 중랑천 길을 따라 의정부에서 노원 방향으로 10km 정도 달리고 있었다.

항상 아파트 단지를 외로이 돌다가 처음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나온 것이다.

저녁이었지만 7월이었기 때문에 열대야로 푹푹 쪘고

당시 내 몸은 러닝에 적응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팔다리에 정신을 맡기고 달리다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에 온 집중을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낯선 사람이 한 손을 번쩍 든 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대로 지나쳤는데, 그것이 러닝 하는 사람들끼리 마주치면 하는 인사법이라는 걸 뒤에 알고는 너무 부끄러웠다.

정말이지 가능하다면 그날로 돌아가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그리고 인사 감사합니다!" 하고 두 팔로 답인사를 해주고 싶다.​

솔직히 나는 겨드랑이를 말리며 달리는 줄 알았다.

(정신 놓고 달려보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책이나 동호회 글을 보며 러닝의 매너들을 숙지하고 나도 매너 있는 러너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그저 내달리면 되는 일이라 시작했던 러닝이었는데, 또 공부한다.

배움에 끝이 없다는 옛말을 떠올린다.

왠지 받고 나면 싫어하실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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