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응급실
퇴직금 시뮬레이션 창을 켰다. 화면에 뜬 금액을 확인하니 한숨이 나온다. 세금을 떼면 얼마가 남을지 모르겠지만, 퇴직 이후의 삶을 설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앞으로 7년을 더 버텨서 20년을 채운다 한들, 퇴직금으로 노후를 설계하기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5시 50분.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자기 몸이 무겁다. 요즘은 늘 피곤하고 컨디션이 안 좋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남편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는 걸 보니 회의 중인 모양이다. 그냥 지하철을 타기로 한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 소연에게 남은 에너지는 10%도 안 되는 것 같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시어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 왔니~ 어서 와~!
- 네, 어머님~ 별일 없었어요?
소연은 손을 씻고 아이를 안아준다. 핑크색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있는 입가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 아침에 등원할 때보다 왠지 조금 더 큰 것 같은 아이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간다. 오늘은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머니랑 뭘 했는지 묻고 싶지만 뱃속에서 아우성치는 배고픔을 달래려 밥부터 욱여넣는다. 소화제는 거의 먹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유난히 더부룩해 찬장을 뒤져서 찾은 유통기한이 지난 소화제 한 병을 마신다.
어머님이 가시고 아이와 단둘이 남은 시간, 이제 몸은 남은 2%의 에너지로 움직이고 있다. 소연의 저전력 모드를 눈치챈 아들은 지루한 얼굴로 미니카를 어루만진다. 딸깍,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들이 강아지처럼 현관으로 뛰어나간다.
- 여보 왔어?
말하며 일어서는 순간, 소연의 눈앞이 시커메졌다. 눈은 떠져 있는데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앉아서 안정을 취해보지만 배멀미하듯 울렁거리고 온 세상이 일그러져 보인다. 남편이 다가와 소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 여보,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 나… 응급실 가야 할 것 같아…
밤 11시가 넘은 시간. 아이를 다시 시댁에 맡기고 응급실 대기실에서 남편 어깨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다. 오늘 바쁜 일정으로 힘들었을 남편에게 미안하고 이런 자신이 속상해서 소연은 자꾸 코끝이 매워진다. 한참을 기다리다 피검사를 한 후 MRI를 찍었는데 의사는 뚜렷한 원인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큰 문제는 없다는 말을 들으니 긴장이 풀렸는지 컨디션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하다. 분명 심한 어지러움과 두근거림을 느꼈고 일어나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답답하다. 의사는 또 그놈의 스트레스, 과로를 들먹이며 집으로 가라고 한다.
- 여보 좀 일찍 자고 운동도 하고 그래. 여보 몸도 챙겨야지.
남편의 걱정 반 꾸짖음 반 섞인 말투에 소연은 울컥한다.
-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 그럼 그 시간에 어머님이 애기 봐주셔야 하잖아.
소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 그리고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린 우리 아들… 놀아줄 틈도 없이 또 나가서 운동할 순 없어. 8시 반이면 자는데 그럼 하루 종일 엄마랑 한 번도 못 노는 거잖아.
- 아니 맨날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3번만이라도 다녀와. 내가 엄마한테 말씀드릴게.
- 지금 봐주시는 것도 어머님 연세에는 너무 힘들어. 나 운동하겠다고 어머님께 육아 부담을 더 지게 하고 싶지는 않아.
- 그래도 여보가 아프면 안 되잖아. 응? 내 말 좀 들어.
소연은 눈앞이 흐려졌다. 고개를 휙 돌리고 주방으로 가서 수돗물을 틀었다. 이미 시어머니가 깨끗이 정리해 둔 싱크대를 괜히 더 닦아댄다. 남편은 주방으로 향하는 소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의 마음도 쓰리다.
그렇게 소연은 어떤 솔루션도 찾지 못한 채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산다. 몸은 점점 약해지고 아픈 곳도 많아지는데 집안일까지 마치고 나면 어느새 밤 10시. 매일 이 시간이 되어서야 잠깐의 여유가 생긴다.
이제 자신을 위한 일,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지만 몸은 이미 방전되었다. 눈동자만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면 졸린 눈으로 쓸데없이 SNS와 쇼핑앱을 뒤적이다 잠이 든다.
그로부터 몇 주 사이, 소연은 두어 번 더 응급실에 갔다. 의사에게서는 늘 같은 말을 들었다. 피로 누적이나 면역력 저하일 수 있다고. 터덜터덜 응급실을 등지고 나올 때마다 소연의 눈은 텅 빈 듯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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