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적게 쓰되 가치있게 쓰기

좋은 소비를 위한 간소한 가계경제

by 니나

어릴 적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꿀벌들의 이야기>라는 책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셨던 할아버지가 가져다 주신 책으로, 출판사에서 정식 출판된 책이 아니라 어느 은행이나 금융단체에서 발간한 초등학생들의 '저축 수기집'이었다.

하도 많이 읽어서 하늘색 표지가 바래고 모서리가 닳아있던 그 책의 이미지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책에는 당시 내 또래의 초등학생들이 저축을 해서(저축보다는 '저금'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 가계경제에 어떻게 보탬이 되었는지 혹은 가지고 싶은 물건을 사거나 누군가를 돕게 되었을 때 느꼈던 기분 같은 것들을 주제로 쓴 수기들이 실려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나도 저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던 것 같다.

그때의 영향 덕분인지 어릴 때부터 아주 소액이라도 저축을 꾸준히 해왔지만, 결혼을 하고 자동차나 집 같은 큰 규모의 소비를 해야 하는 순간을 거칠 때마다 저축이 우선인지 소비가 우선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다.

은행의 힘을 빌리고 나니 상대적으로 너무 소소해 보이는 나의 저축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 아이를 낳고 초보 엄마 시절에는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은 가치판단을 거치지 않고 쓰다 보니 저축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사야 할 것은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렇게 소비와 맞바꾼 물건들이 집에 쌓여갔고, 안 쓰는 물건들을 볼 때면 차라리 저축이나 할 걸 후회하는 순간이 왔다.


이후 심플한 삶을 실천하면서 소비 규모를 줄여보기로 했다.

무조건 아끼기보다 가짓수를 ‘적게’ 샀다.

심플한 삶, 미니멀리즘에 대한 책을 읽으며 조금씩 집 안을 정리해나가다 보니 물욕이 차츰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계획하지 않았던 엉뚱한 곳에 지출하는 일이 줄어들어 정해진 예산 내에서 돈을 소비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저축을 꾸준히 해왔던 나라도 일단 수입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둘째 출산 이후 두 번째 육아휴직을 앞두고는 엑셀에 고정지출과 변동지출 항목들을 써보고 예산을 세워 관리하기 시작했다.


많은 재테크 도서에서 통장을 쪼개어 관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일부분은 동의하지만 너무 많은 통장은 오히려 관리하기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심플한 방법을 택했다. 각기 다른 은행 두 곳에 계좌를 개설해두고, 주거래 은행 계좌에서 모든 자동이체 건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뒤 매 월 고정된 생활비 예산만 남겨두고 저축 가능 금액은 다른 은행 계좌로 옮겨놓는 식이다. 기본에 충실한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에는 다른 투자수단보다 적금, 예금을 반복하는 것이 잘 맞았는데, 육아휴직 기간 동안 다른 방식의 금융투자도 공부해서 자산을 늘려볼 계획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입보다 지출을 적게 하고 수입의 일부를 반드시 저축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물론 정해진 금액 안에서 생활하는 삶이 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가끔은 그냥 내키는 대로 소비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이왕 쓰는 거 ‘잘 쓰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순간을 위한 충동적 소비를 하기보다, 가치 있고 오래도록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소비를 하고 싶다.

이왕이면 좋은 물건, 좋은 경험을 하는데 돈을 쓰려고 한다.

평소 간소한 생활을 통해 예산을 마련해두고, 정말 써야 할 가치가 있을 때 아낌없이 쓰는 것.

내가 지향하고 있는 소비의 모습이다.


가치있는 소비를 하려면 예산과 더불어 좋은 제품을 골라낼 수 있는 심미안이 있어야 한다.

심미안을 기르기 위해서는 많이 써보고 경험해봐야 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간소함과는 상충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최근에는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하므로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서도 좋은 제품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금융 교육을 꼭 시켜줄 계획인데, 좋은 소비와 나쁜 소비를 구분하는 방법부터 말해주고 싶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위해 쓰는 소비를 줄여야 하고,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정말 갖고 싶었던 물건을 구입해서 온전히 누리는 즐거움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좋은 소비, 가치 있는 소비를 위하여, 더 잘 쓰기 위해 간소한 가계 경제를 꾸리며 저축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