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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예슬 Feb 09. 2021

꿈 일기 #9


꿈에서 서너달 전 잠깐 만났던 아이와 계속 만나는 중이었고, 일찍부터 만나 데이트를 했던 터라 그런지 이상하게 피곤하여 내심 그만 헤어지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는데, 내가 캠핑을 가고 싶어했었단 걸 기억하고는 서프라이즈인 듯 예약해놨으니 고기 먹으러 가자고 해맑게 얘기하는 덕에 따라 나서기로 했다. 왜인지 둘 다 각각 차를 가지고 나온 상황. 자기가 앞장 설테니 바짝 붙어 따라오라고 하고 먼저 출발한 그 아이의 차는 너무 막히는 도로 탓에 시야에서 아득히 멀어져버렸고, 이렇게 된 거 아침부터 못 들여다봐서 엉망이 된 화장이나 잠깐 고쳐야겠다 싶어 근처 건물에 주차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 여자화장실이라 하고 문을 닫으려 했는데 벌컥 다시 문을 여는 남자. 뭐 하는거냐 물으니, '이런 상황을 "망했다"고 하지?' 하는 음성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문을 버티고 있는 남자 옆구리 쪽에 난 빈틈으로 빠져나가보려 했지만 이내 붙들렸고, 그 남자는 라이터를 꺼내 내 오른 엄지 손가락에 불을 붙였다. 어떤 사람의 흔적도 없는 공허한 건물 안, 제발 우연히 지나가는 경찰이 있기를 바라며 악을 질러댔다. 그리고 곧 정말 경찰이 나타났고, 다행히 엄지 손가락 화상을 제외하고 큰 화는 없었다.


화상 때문에 난 상처 위에 경찰 아저씨가 한번 더 불을 태워 상처를 떼내어주었고, 손가락은 말끔해졌다. 아직도 놀란 마음에 손을 벌벌 떨며 (꿈 속) 남자친구에게 전화해서 강도를 만난 일을 설명하고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었다. 자꾸 횡설수설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그 아이에게 그냥 네비 찍고 갈테니까 주소를 부르라고 짜증을 냈는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반문하는 그 아이. 내가 엄지 손가락만 다쳐서 심각성을 몰랐나보다. 근데 한편으로 이렇게 별일 아니게 느껴지는 일 뿐이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거다. 강도가 칼이 있어 내 살점을 뜯어내기라도 했으면, 혹은 강도에게 성폭행이라도 당했으면. 평생 씻을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텐데 고작 엄지 손가락 뿐이었어서.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을 리플레이해보며 어쩌면 내가 '긍정적인 사고'에 가끔은 너무 집착하나 싶은 생각도. 손가락 뿐이라도 아픈 건 아픈건데. 예민하다 할 게 아니라 이해와 위로가 먼저였어야 했던건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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