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돌아올 즈음엔.
밀다: 머리카락이나 털 따위를 매우 짧게 깎다.
‘어머, 우래기잖아?’
지난 초여름, 나폴나폴 날리는 우래기의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밀어주었다. 배냇머리는 백일 즈음 밀었고, 이번엔 깔끔한 정리 겸 여름맞이로 아주 바짝 깎아주었다. 두 달 정도 지난 지금, 우래기의 머리에는 짧은 머리카락이 밤송이처럼 자랐는데, 거울 속 내가 딱 그 모습이었다.
“제가 어린 애기가 있는데, 여름이라고 머리를 밀어줬거든요? 근데 제 모습을 보니까 아들이랑 너무 닮아서 웃음이 나네요~”
만지작거리던 핸드폰 배경화면에 우래기 사진이 나오자, 매니저님은 “어머! 정말 어리네요! 귀여워라!“ 라며 웃어주셨다.
오른쪽을 미는 동안은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슬프기보단 웃겼다. 못 쉥겨지고 있음이.
“혹시 머리가 빠져서 오신 거예요?”
매니저님은 조심스럽게 몇 번째 항암인지 물었다.
“아, 저 다음 주에 해요. 아직 항암 안 했는데 두피에 통증이 생긴다길래 일찍 왔어요.”
조금 성격이 급한 손님이 된 것 같아 머쓱했다.
“저희가 면도까진 해드리진 않아요. 두피에 상처가 나면 감염 위험이 있어서요.”
항암치료를 시작했는지 물어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약 치료를 시작한 환자라면 더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무리해 드릴게요.”
삭발의 마무리는 헤어에센스나 오일이 아닌 손가락 길이의 청소용 미니 돌돌이였다. 드라이어로 잔머리카락을 날린 뒤, 돌돌이로 두피에 딱 달라붙은 아주 작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리해 주었다.
“엄마! 끝났어요! 나 봐도 돼!“
커튼 밖에서 모자를 구경하고 계시던 엄마는 조심스럽게 커튼 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리 딸, 이쁘네!”
고슴도치 엄마는 머리를 민 젊은 딸을 안심시키느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객님 두상이 진짜 이쁘세요!”
“네, 얘가 머리통이 이쁘죠?”
엄마들의 자식자랑이란. 하긴 나도 앞뒤짱구인 우래기 두상을 늘 자랑하곤 했다.
매니저님은 나의 원래 기장에 준하는 까만색 가발벙거지 모자를 씌워주었다. 꽤나 그럴듯했다. 본격적으로 가발을 둘러보니, 기장은 4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처음 씌워준 기장이 가장 자연스러워 길이 순으로 3번째 것을 고르고, 모자는 챙이 조금 짧은 것으로 바꾸었다.
그다음엔 두건을 골랐다. 동화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양’에서 엄마인 척하려는 늑대가 둘러쓰는 그런 모자였다. 가발보다 아픈 사람으로 보이긴 하지만, 이 더위에 가발만 쓸 순 없다. 이 짧은 머리도 자연스럽게 계속 빠질 것이고, 항암을 하면 부분 부분 떨어질 거라 집에서는 가볍게 이런 두건을 두르는 게 좋다고 했다.
가발모자에 두건까지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통가발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다. 두피관리 에센스를 함께 팔고 있었는데 구입하고 싶었지만 품절이라 차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길, 삭발 후 처음으로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가발 덕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빠는 그 사이 우래기가 응가를 두 번이나 해서 기저귀를 여러 번 갈았다는 문자를 보내오셨다.
“야, 니네 아빠가 우래기 기저귀 갈았대! 이제 할아버지랑 둘이 있어도 되겠다!”
“오, 아빠가? 많은 발전이야. 에효, 우래기가 엄마 모습 보면 어떠려나~?“
집에 도착하자 우래기는 낮잠을 자고 있었고, 아빠는 내 가발 쓴 모습에 긴장하신 듯했다.
“우리 딸, 안 울었나?”
“에이, 울긴 왜 울어. 나 너무 더워서 가발 벗을게.”
훤히 빛나는 딸의 머리를 보며 아빠는 생각보다 뒤통수가 튀어나왔다며 신기해하셨고, 엄마는 얼마나 노력해서 얻은 두상인지 추억 속 육아이야기를 꺼내셨다.
“내가 얘 항상 옆으로 눕혀놨잖아. 큰 딸은 옆으로 뉘여도 맨날 천장만 보고 있어서 납,짝하고.”
두건을 쓰려고 하자, 부모님은 집인데 편히 있으라며 안 써도 된다고 하셨다. 사실 내 머리를 자주 보는 건 가족들이지, 내가 아니었다. 두 분 다 괜찮다고 하시니, 편하게 지내야겠다.
머리를 밀고 보니, 장점이 참 많다. 머리 감는 시간이 필요 없으니 샤워시간이 짧아졌다. 머리를 말리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고, 또 세제도 덜 쓰니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 싶다. 왠지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목이 가볍고, 이 여름에 참 시원하다.
삭발이 제품이라면 나는 한 달 사용 후기를 꼭 남겼을 거다.
‘한번 해보세요, 추천합니다. 생각보다 좋아요!‘
겨울엔 머리카락이 없어 머리가 시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또 그 겨울엔 선항암을 마치고 머리카락이 돋아나기도 할 것이다. 봄날의 새싹처럼. 나의 머리카락이 돌아올 즈음엔 나도 다시 돌아갈 것이다. 건강한 호락이로.
23.08.10. 목요일.
우래기는 잠에서 깨 눈을 끔뻑거리며 엄마의 두건을 벗겼다. 그리곤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