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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무 Feb 01. 2021

살림이 체질인 줄 알았는데

도구의 힘을 넘어 기록의 힘으로


도구의 힘으로 재미를 붙였던 살림


독립한 지 13년 만에 살림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나의 살림 역사는 독립역사에 비해 무척이나 짧은데, 물컵이 없어 선물 받은 와인잔에 각종 음료수와 물을 따라 마시고, 라면포트 하나와 수저 한 짝으로 5년 가까이 생활하기도 했다. 빨래도 개지 않아서 건조대에 널린 옷을 '주워' 입고 다녔다. 그러던 내가 살림에 재미를 붙이게 된 지 어언 2년. 시작의 동력은 도구의 힘이었다.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컵과 식기들, 쓸 줄도 모르는 스테인리스 팬과 주물팬, 새까만 코팅 팬이 아닌 아이보리빛의 냄비와 웍, 공짜로 나눠주는 행주가 아닌 정갈한 체크무늬의 키친 클로스, 음식재료를 계량하기 위한 저울, 레트로 한 디자인의 타이머, 요리 실험실에 와있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비커, 뭔가 있어 보이는 독일산 무광택 채칼, 앙증맞은 디저트 스푼, 카모메 식당에 나올 것 같은 커트러리, 분홍색이 아닌 파스텔톤의 고무장갑, 식탁 위의 따뜻한 감성을 채우는 라탄 바구니와 우드 제품들...

이런 도구들은 나를 요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마치 좋아하는 노트와 필기구를 구입했을 때의 실행능력과 비슷하다. 새로 산 펜과 노트를 쓰기 위해 안 쓰던 일기를 열심히 하게 만드는 문구의 힘!처럼 말이다.



바질 키워먹기



도구의 배신


그런데 말이다, 소비의 힘으로 펌프질  살림 재미는 금방 식어버렸다. 처음엔 없어서 사야 하는 명분이 있기에 예쁜 살림살이 도구들을 하나둘씩 사 모았지만 그다음은 많은 사람들이 겪어본 바와 비슷하다. 영롱했던 아이보리 냄비는 아무리 닦아도 누런색 냄비로 바뀌는 걸 피할 수 없고, 식기세척기 이용 가능 이라던 예쁜 색깔의 수저세트도 몇 번 기계의 뜨거운 맛을 보더니 칠이 벗겨져 추해졌다. 라탄 바구니에선 자꾸만 부스러기들이 나와 테이블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습기에 약한 라탄 컵받침엔 하얀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우수한 코팅력을 자랑한 모 회사의 아이보리 코팅 팬은 2주 만에 계란 후라이가 눌어붙었다. 프라이팬의 코팅력이 계란 유통기한보다 짧다니! '너의 주방을 환하게  거야.'라고 광고한 많은 도구들에는 적혀있지 않는 유통기한이 있었나 보다. 참 허탈하다. 살림 재미엔 유통기한이 길었으면 했는데. 이렇게 살림 도구빨이 끝나갔다.


그렇다고 나의 살림 재미를 또 다른 소비로 채우고 싶진 않았다. 이미 맛있는 요리를 하기에는 가지고 있는 도구로 충분하다. 제로 웨이스트를 위해 재활용 가능한 예쁜 용기를 사볼까 했지만, 버리는 걸 줄이기 위해 또다시 새로 사는 건 뭔가 불편하다. 제로 웨이스트의 진정성은 예쁜 살림살이 도구에 있는 게 아니라 그만 사는 거 아닌가. '친환경'이라고 써붙인 많은 포장 용기들을 보면서 '사는 것'이 친환경이 아니라 '덜 사는 것'이 환경을 위한 일인데. 의미를 같다붙인 예쁜 쓰레기들을 보면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고, 살림이 어려워진다.



여전히 재밌긴 한데.. 왜 하기가 싫지


요리만 그런 게 아니라 살림의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청소와 빨래, 설거지가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머리카락 한두 개만 보여도 청소기를 돌렸지만, 로봇청소기의 편리함에 눈을 뜨자 더 이상 청소가 재밌지가 않다. 설거지 거리가 생기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설거지는 쌓여야 할 맛이 나지- 하며 모아두었다가 한다. 빨래 후 옷을 개는 것도 옷무덤으로 (조금 오바해서)왕릉 두 개쯤 만들어져야 겨우 정리를 한다. 매일 아침 물꽂이한 꽃들의 줄기를 자르던 내가 이제는 양치를 하다 말라버린 이파리를 보고 부랴부랴 화분에 물을 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하기 싫은 건 창틀 닦기, 현관 발자국 닦기, 화장실 청소, 부엌 후드 청소다. 이건 살림이 체질이어도 재미가 없다. 물론 하고 나면 마음은 시원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하기 싫은 건 '오늘 뭐 먹을지' 고민하는 거! 혼자 있을 땐 전혀 상관없는데 동거인이 생기면서부터 괜히 부담이 생긴다. 낫토랑 김만 있으면 한 달 내내 밥을 해결할 수 있는 나와달리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는 동거인에게 매일 똑같은 메뉴를 주기도 그렇다. 살림이 여전히 재밌긴 하나 이 강도 높은 성실함을 요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무엇보다 나의 살림살이가 그냥 되는대로 해치워지게 놔두긴 싫다. 꺼져가는 살림 재미에 불씨를 지피기 위해서 문구의 힘을 빌려보기로 한다.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인  ‘기록과 정리’가 살림과 합쳐지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실험정신으로 실천해보았다.



1년 치 식단표와 실제 먹을 것을 기록하는 노트


우선 가장 귀찮은 일인 '오늘 뭐 먹지' 1년 치 식단표를 만들었다. 물론 그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1년 치 식단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조금은 덜 귀찮다.

“오늘 뭐 먹을래?”라고 물어보면 매번 “너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라거나 “글쎄 별 생각이 없네.”라고 대답하는 동거인에게 선택을 줄 수 있다. “투움바 파스타 먹을래 아니면 당근 라페 김밥과 어묵탕 먹을래?” “음.. 네가 먹고 싶은 거.” “안돼. 넌 반드시 선택해야만 해!” “그럼 김밥이랑 어묵탕 먹을게!” “알았어~ ㅎㅎ”

오늘의 하기 싫은 일 중 하나를 마쳤다. 계획한 것과 실제 먹은 것의 차이가 있어서 ‘오늘 뭐 먹었지’ 노트에 빈칸을 채우는 재미도 추가했다.



레시피 노트를 마련한 이후로

요리는 더 재밌어지고, 맛은 덤으로


오늘 먹은 것들을 기록하는 파일


요리할 때 레시피를 검색하면 매번 다르고, 계량도 다르다. 무엇보다 요리하다가 핸드폰을 다시 만지는 게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니다. 손을 또 씻고, 이건 왜 이렇게 하지? 궁금해서 뭐 좀 찾다 보면 결국 동거인의 퇴근시간이다. 여유롭게 하고 싶었는데.. 뭐든 급하게 하면 실수하게 된다.

그래서 지난번에 내가 했던 레시피와 실패사례, 팁들을 적어놓은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미세한 차이까지 잡아내는 핀셋 같은 입맛을 가진 동거인 덕분에? 내 혀로는 알 수 없었던 오차를 줄이고 맛이 저하된 원인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레시피 노트의 기록도 여러 번의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 적당한 사이즈의 노트를 찾는 것부터, 필기구, 글씨 크기 등등 말이다. 한 번은 수성펜으로 적었다가 공책에 물이 틔어 나의 소중한 노하우가 번져서 사라져 버렸다.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로 가능한 일이다. 유성펜은 뭔가 부담스럽고, 얇은 펜으로 쓰면 요리할 때 잘 안 보인다. 멀리서도 커닝하기 좋은 글씨 크기여야 한다.

지금 쓰고 있는 노트는 A5 사이즈의 양장 실제본이고, 까만색 색연필로 크게 적고있다. 요리 후에 후기나 키포인트, 팁들은 색깔 펜으로 적어놓는다.



재료의 재발견으로

다시 찾아가는 요리의 재미


이렇게 매번 기록하다 보니 내가 특정한 재료들을 유독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한식, 양식, 중식을 하는 재미도 발견했다. 노트를 뒤적뒤적하다 보면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이 생각이 나서 '오늘 뭐 먹을까' 고민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시간이 나면 재료별로 레시피를 다시 정리하기도 한다.


집에 친구들이 놀러  때마다 나름대로의 메뉴판도 구성해본다. 메뉴 순서, 플레이팅은 어떻게 할지 스케치하다 보면 그것이 우리 집의 시그니처 메뉴로 자리 잡게 된다. 역시 요리의 재미는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할 맛이 나고 발전한다. 이런 것들을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매번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거다. 이게 바로 기록의 힘인가 보다. 재료마다 특징이나 보관방법, 또 다른 재료와의 궁합 등등을 적고 있으면 요리 연구가가 된 기분이다. 해보고 싶은 요리가 생길 때마다 기록하는 재미가 있고, 기록은 쌓여가는 맛이 있다. 무엇보다 노트가 두꺼워질수록 내가   있는 요리능력 게이지가 상승하는 기분이라 자신감도 붙는다.



토마토마리네이드, 고사리 토마토 파스타, 오이/청양고추로 만든 피클


질릴 때까지 주구장창 먹어도 또 먹고 싶은 재료-

토마토, 당근, 그릭요거트


나는 하나의 음식에 꽂히면 한 달 내내 질릴 때까지 먹는다. 그리고 한동안 좀 멀리하다가 다시 반복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한 재료를 많이 사두면 버리는 일이 많지 않다. 작년엔 토마토에 빠져서 홀토마토 병조림까지 만들어서 두고두고 먹었다. 라따뚜이도 하고, 볶은 마늘을 바게트에 올린 후 토마토를 얹어 먹기도 하고, 토마토 마리네이드도 만들고, 고사리와 토마토로 파스타도 만들고, 토마토 프리타타도 해 먹었다.


3달 전엔 집에서 요거트 만들기에 빠졌는데, 유청을 빼서 꾸덕한 그릭 요거트를 세 달 내내 먹었다. 그래놀라도 넣어먹고, 귤잼도 넣어먹고, 과일도 넣어 먹기 딱 좋다. 손님이 오면 오븐에 감자를 구워 그릭 요거트를 올려 먹어도 맛있고, 양파와 요거트, 마요네즈를 섞어서 만든 치킨난반은 인기가 좋았다.


요즘 완전히 홀릭되어버린 재료는 당근이다. 당근 라페를 만들어서 김에도 싸 먹고, 베이글에 치즈를 발라서 잔뜩 얹어 먹기도 한다. 김밥을 만들기도 하고, 그냥 샐러드로도 우걱우걱 먹는다.

당근 라페 레시피는 인터넷에 많이 나와있지만, 내 입맛에 맞는 팁은 1. 소금을 넣지 않는다 2. 유자청을 두 스푼 넣는 것이다. 대부분의 레시피엔 소금을 넣어서 아삭한 식감을 살리라고 하지만 나는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좋아해서 많이 넣으면 충분히 짜다. 유자의 향은 당근과 환상적인 조합이라서 꼭 넣는다.


재료들마다 이렇게  맞는 궁합을 만나게 되면 뭔가 외로운 친구이게 짝을 지어준  같아 뿌듯하다. 

건강한 음식을 잘 먹고 나면 다시 요리할 맛이 난다. 그 힘으로 다시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정리하고 나면 다시 살림에 대한 재미가 오동통 불어난다.


“우리 일상 경험의 영역에서 식사보다 더 신비로운 일은 아마 없으리라. ... 식사는 일상에 있어서의 축제이다.” - 칼 라너의 <일상>중에서

 

한달치 식단표 대충 그려봤습니다
2월의 식단표 완성~! 늘 비슷하지만 그래도...


실제 먹은 푸드기록은 파일에 저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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