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매거진 창간호
시간의 환상동
시차를 두고 멈추어버린 동
동대신동 / 이현정
사진
내게 동대신동은 '산복도로 프로잭트'라는 카페가 전부였다. 길 위로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순간, 나에게로부터 낯선 마을이 되었다. 담 위에 늘어선 오래된 빨랫줄, 주차금지 표지들, 작은 냉장고 안의 과일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은 평소에 내가 보던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는 작업이 내게 준 선물이다.
시간
낮에 걷고 밤에 한 번 더 걸었다. 낯선 이방인으로 걷고, 안내자를 따라 밤에 다시 걸었다. 보이지 않던 평상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작은 아이가 뛰어가다 부딪힌 벽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거리는 시간을 푸모, 기억을 새겨놓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걸으니 10년, 20년을 거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1초, 2초.
걷는 동안 세롤의 필름을 사용했고, 그중 하나는 작년에 찍었던 사진과 겹쳤다. 그게 좋은거다. 경계가 없어서 좋고, 과거의 시간과 지금이 함께여서 좋다. 반드시 이곳이 아니라도 좋다. 마을 전체에서 느껴지던 동화적 환상이 보인다. 산복도로를 그렇게 바라본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금방이라도 쏟아 질듯하다. 오래된 곳에서의 불편한 삶을 생각한다면 그건 참으로 이기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멋이 없는게 아니다. 사람이 없는게 아니다. '색'이 없는게 아니다.
찰-칵
세상의 수많은 경계를 생각하며, 그 의미 없는 흐릿한 경계들을 생각했다. 창가에서 대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에 의지해 걷고 또 걸엇다. 오밀조밀 붙어 한 부분처럼 되어버린 집들 사이에서 멈췄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느라 카메라가 분주하다. 셔터로 찰-칵! 소리가 완성되는 시간은 이야기로 채워진다. 반짝반짝 알록달록, 사람들의 마을이다.
응원의 글
부산의 작은 모퉁이 마을, 동대신동 골목길이 보이는 곳에 앉아 있습니다. 등으로 흐르는 땀을 선풍기 바람이 식혀주고, 나는 편히 글을 씁니다.
HERE 창간 준비호를 만난 것이 봄이었으니 두 계절을 지내며 우리들을 이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곰곰 생각합니다. 대연동 못골 조용한 주택가에 "생각다방산책극장"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담쟁이가 집의 외벽 전체를 감싸고 노란대문을 들어서면 고양이 두 마리가 반기는 곳, 2011년 7월에 문을 열고 가까운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들다 이젠 네다섯 정도가 된 "백수들의 실험실" 흘러가라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라는 말이 3년 전 나의 문장이었다면 지금 나는 원하는 곳을 지나고 있는가?
작년 3월부터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친구들의 글이 하나로 모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들이 꾸준히 글을 써 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원고를 청탁하고 혼자 MS 워드로 엉성하게 편집하고 찍히지 않는 바코드를 표지에 실은 <생각산책>이 탄생한 것입니다. PDF 파일로 만들어 블로그와 메일로 공유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것이 흘러 누구의 손에 들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 한 시절을 함께 보내는 우리가 서로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속 깊은 이야기를 글을 통해 얼핏 눈치 채고 살짝 손잡아주고. 그렇게 7호까지 나왔습니다.
한 구석에서 생각산책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맨 처음 HERE 잡지의 참여를 제안 받았을 때 아, 분명히 필요한 자리구나. 부산에 살면서도 주변을 제외한, 유명한, 관심 있는 곳 이외에 몇 개의 동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나부터 걸어야겠다는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낯선 동네를 걷는 내내 세상의 모든 경계를 떠올렸습니다. HERE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면서 당신이 넘나들 경계는 무엇일까, 상상 해 봅니다. 저기가 아닌 여기를 중심에 둔 용기, 여기에만 있지 않고 주변과 너머의 여기를 일으킨 파장이 저기에 있는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인사.
종이 한 장 만큼의 거리. 여기를 지나는 우리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장소로 HERE이 있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