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엮는 작업의 시작을 계속해서 미루게 되면서 나는 전처럼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 도착하는 그들의 글 안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다방과 만난 시작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왜 모두들 시작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걸까? 생각다방 산책극장을 연 이후로 꾸준히 받았던 질문,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그게 그래서… 몇 백번은 반복했을 ‘시작의 이야기’를 이 책의 시작에 다시 한 번 쓰려니 도무지 시작을 못해서 난감한 날이 이어졌다. 마지막 친구의 글이 도착하고 드디어 마음도 준비가 되었다.
2010년 내가 25살이던 때, 대학은 졸업했는데 앞으로 뭘 하고 살지? 돈은 어떻게 벌지? 고민하다가 이대로 취직을 하기는 싫다는 마음에 맞닥뜨렸다. 아직 해보고 싶은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영혼 없이 출퇴근하는 일을 곧바로 시작하기에 난 너무 젊지 않은가? 태생적으로 경험주의자였던 나는 영화도 만들어보고 연극도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며 장래희망을 찾아 나섰다. 그때 만난 이내언니와 몇몇의 친구들은 함께 자주 만나기 시작했는데, 카페나 식당 아니면 술집을 전전하며 만나다보니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돈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만나고 싶지만 돈이 없어 못만나는 슬픈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내가 살던 8평 원룸에 초대하여 밥도 해먹고 느긋하게 놀다가 헤어지곤 했다. 그러나 내 방은 너무 작고 사적인 공간이라 매번 집에서 만날 수는 없었고, 최대 수용인원은 6명 정도. 둥근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은 모두가 돌아가면서 무릎을 세워 앉아야만 했다. 그땐 그것도 재밌는 상황이라고 하하하 웃고 말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백년어서원에서 일을 막 시작해서 부산 생활에 적응하는 중이었는데, 백년어서원 건물의 1층을 운영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이내언니와 함께 우리가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의지를 내고 공부도 할 겸 무작정 서울로 일주일간 비즈니스 여행을 다녀왔다. 어디를 갈지도 정하지 않은 채 소개와 소개로 닿은 곳들을 둘러보며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우리들의 장소를 상상했다. <사직동 그가게> 옆에 <커피한잔>이란 가게가 있었는데, 사장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조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버리기 전에 무엇을 남길지 먼저 생각하세요.’ 사실 <커피한잔>의 인테리어에 홀딱 반했기 때문에 사장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콕콕 와 닿았었다. 명륜동에서 발견한 <새바람이 오는 그늘> 역시 우리 취향. 고민에 빠졌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도드라지지 않고 무난한 가게인가, 우리의 취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무일푼이었던 우리는 대출을 받아서 가게를 열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비즈니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서 계획이 무산되는 바람에 몇 날 며칠의 고민은 쓸모가 없어졌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 때 대출을 받아서 가게를 열었다면 ‘생각다방 산책극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테니까.
결국 마음껏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곳을 다시 찾기로 했다. 그리고, 우선 500원을 모아서 씨앗 자금을 만들자! 커피값 2,500원, 밥값 5,500원, 담배값 2,500원 내고나면 잔돈이 500원 생기니까 그것부터 한푼두푼 모아보자고 했던 것. 그러던 중에 누군가 ‘재개발 지역에 가면 싼 집이 있을 수도 있다’고 알려줬고 내가 살던 대연동에 마침 재개발이 예정된 곳이 있어 근처 부동산에 찾아갔다. 쭈뼛쭈뼛 ‘저희가 돈이 없어서 최대한 싼 집이 필요해요. 오래되고 허름해도 불편해도 괜찮아요’ 말해버렸는데 부동산 사장님은 적당한 곳이 있다며 바로 남구청 뒷길로 우리를 이끌어 담쟁이가 울창한 주택하나를 소개해 주신다. 첫 눈에 반했다! 우와 주택 한 층을 전부 쓸 수 있다고? 너무 좋다! 함께 간 친구들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우리는 덥석 계약을 했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0만원, 어차피 재개발 때까지 비어있을 집이었는데 10만원이라도 내고 쓰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집주인으로서도 꽤 괜찮은 계약이었던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어차피 재개발 된다면 우리마음대로 꾸며서 쓸 수 있을 테니 이만한 기회가 없었고. 어차피 우연과 인연이 역사를 쓰는법이지.
절묘한 타이밍과 과감한 선택은 ‘필연적인 시작’에 꼭 필요한 요소인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곧 허물어지기엔 아쉬울 만큼 멋진 집이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현실은 역으로 지금 이 순간을 의식하며 살게 했다. 직장도 없고 딱히 능력이 있는 것 같지 않은 우리들을 사람들은 백수라고 불렀다. 아직 우리는 하고 싶은 일과 몰입하고 싶은 장소를 찾지 못했으니까, 백수가 맞습니다! 그래서 목적이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편히(잔소리가 없는 곳에서) 무엇이든 실험해 볼 수 있는 장소로 존재하기를 바랬다. 계획도 없이 의도 없이 순간순간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기다렸다. 무모하고 엉뚱하고 기발하고 순수한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