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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예술창작 : 집에서부터 시작하자

by 히요

집이 갤러리 / 토론장 / 녹음실 / 출판사

카페 / 공연장 / 게스트하우스가 된 이야기



대연동 못골역 근처에 있었던 나의 방. 좁은 베란다가 있었고 큰 창이 하나 있었다. 밤이면 골목길을 밝히던 오렌지 불빛이 불투명한 창에 비쳤고 나는 그 불빛을 좋아했다. 한 칸짜리 싱크대와 가스불 두 개로 충분했던 살림. 설거지 감이 넘칠 때면 다 씻은 그릇을 둥글고 낮은 탁자에 놓아가며 해야 했지만 괜찮았다. 작은 욕실이지만 세면대와 샤워기와 변기가 있으니 가끔씩 다방에 놀러왔다가 자고가는 친구들의 목욕탕 역할을 하기도 했다. 침대가 하나 있었고, 디지털피아노, 오디오, 책들, 옷장 하나로 꽉 찼던 나의 작은 방이지만 이곳으로 친구들을 초대했다.


간단히 카레를 하거나 전골을 만들어 나누어 먹었고, 직거래로 구입한 바디가 커서 품에 다 안지 못하는 기타를 치며 놀았다. 방 한 가운데 있는 형광등 아래로 내가 만든 인형들을 주렁주렁 걸어두었다. 이미 누웠는데 불은 끄기 귀찮은 밤에 그 긴 인형줄을 당겨 끄곤 했다. 시장에서 구입한 예쁜 조명을 켜서 분위기를 냈고, 이사 선물로 받은 작은 테이블은 베란다에 내놓고 내 방이지만 굳이 내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싱크대 앞 타일과 서랍, 출입문을 좋아하는 색의 물감으로 칠했고, 잡지나 책에서 오린 이미지와 문구를 집안 곳곳에 붙여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방은 금새 가득 찼다. 처음으로 가져본 오롯이 나를 위한 8평 원룸이 정말 좋았다. ‘흘러가라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PAPER》 잡지에서 발견한 나의 좌우명과 같은이 문구를 꽤 오랫동안 곁에 두고 살았다. 같은 잡지에서 ‘사직동 그가게’ 간판이 구석에 조그만하게 인쇄되어 있었는데 글씨가 너무 이뻐서 오려다 벽에 붙여두고 계속 보며 지냈다. 한참 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다. 인연은 정말 따로 있나보다.


생각다방 산책극장이 생기고도 집에서 했던 것처럼 친구들을 초대하다보니 하루는 카페가 되었다가, 밤에는 게스트가 묵어가기도 하고, 재능있는 친구의 작품을 벽에 걸면 그곳은 갤러리, 틈만나면 우리는 대화를 했다. 프린트기를 대여해서 본격적으로 잡지를 만들어 보기도 했으며, 새벽에 다락방에서 봄눈별과 함께 첫 앨범 녹음을 했던 기억도 난다. 방이 있고, 부엌이 있고, 컴퓨터와 휴대폰, 이불만 있어도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아니 모든 것이 없어도 할 수 있다. 해 보고자 하는 마음만 준비되었다면 어디서라도 시작할 수 있다.


생활예술창작가. 예술을 생활 속에서 누리고 남기는 것. 그 속엔 사람과 관계와 장소가 있죠. 문화는 자연스럽게 형성될 뿐. 적어도 수년(그 곳 그것이 몸이든 장소든 상관없이) 머물며 생긴 시간의 습관 같은 것이 문화라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대의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2011.10.29. (히요)


여름날 지친 히요는 언제나 듬직하다. 느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말하지만 다르게 걷는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말하지만, 선호와 취향이 자신다운 고유한 사람이다. 2011.7.15. (이내)


곁의 응원과 사랑을 받으며 나는 성장할 수 있었고,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친구들 모두에게 그리고 이내언니에게.






* 가수이자 아티스트 이상은의 책 『ART&PLAY:예술가가 되는 법』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잡히지 않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던 2009년, 나를 이끌어 주었다. 책 안에서 발견한 ‘인생은 예술, 예술은 놀이’ 철학은 지금 내 활동의 중요한 표석이 되어 나를 받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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