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백년어》5호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길을 걷다가 좁다란 골목을 발견합니다. 가끔은, 익숙해서 편한 길을 벗어나 어디로 이어질지도 모를 그곳으로 걸어가 봅니다. 혼자일 때는 마음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될 일이지만, 동행자가 있을 경우 동의가 필요합니다. 미묘한 취향의 대치를 넘어 들어선 골목 안, 무심하게 담장위에 놓여있는 화분 4개. 아마도 봄엔 푸른 잎을 가느다란 가지에 피워내고, 너무 작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꽃이 지고 아름답게 물든 잎을 떨궈 냈을 작은 생명, 조그만 화분에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렇게 몇몇 마을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받으며 일년을 보냈을 겁니다. 참 따뜻해 보입니다. 그 작은 나무에게 겨울은 방학입니다. 저-기 반대편에 아주 재미난 모퉁이가 보이네요. 버튼을 누르면 농구공들이 댕그르르 굴러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다 문득, 유리벽 사이로 거리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갑자기 상상의 자판기 속에 농구공들을 가두어놓고 재밌어한 나의 철없는 생각이 미안해집니다. 머쓱해져 걸음을 옮기자 그곳에 당신이 있네요.
보이나요. 당신. 눈이 내리고 있어요. 세상의 끝에서부터 출발한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걸까요. 지금도 전신을 비비안 웨스트우드로 감싼 당신의 미안한 듯한, 약간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을 나 또렷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무와도 나눌 수 없을 고고한 의사를 흑수정 같은 눈동자 속에 품고 있으면서 당신은 언제나 세상에 대해 비굴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원망하면 좋았을 텐데, 당신을 상처 입히고 비웃는 자들을 저주하면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조금은 이 세상 안에 당신이 있을 곳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큰 소리로 외치지도, 불평을 하지도 않고 조용히 부서져 갔습니다.
아아, 난 당신의 건전한 혼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식이라는 이름의 병든 혹은 후안무치하고도 뻔뻔스럽게도 물질적인 요구만을 내세우며 지금도 신경질적으로 이 세계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체념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려 고통을 맛볼 필요가 있었을까요.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의 잡화점- 다케모토 노바라
단골집 의자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까이 지냈지만 우린 참 다르네요. 하지만 달라서 좋습니다. 내가 가진 물의 이야기와 당신의 바람이야기가 만나 비를 내리게 합니다. 가랑비에 촉촉 마음이 젖었고, 당신과 내가 일어선 자리에서 낡은 의자 둘이 남아 모퉁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곳, 허름한 나무다리 사이에 틈이 존재합니다. 너무 가까워 경계하고 너무 멀어 낯설지 않게 꼭 필요한 틈. 우연한 곳에서 매번 참 좋은 곳,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뒷골목을 헤매다 다시 익숙한 길로 들어서면, 그 신비한 감정이 이어져 마음은 방황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사소한 감정의 경험들이 반복되고 지속되어야 비로소 본래의 자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낯설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낯설다는 느낌이 바로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