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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쾌한 봄

계간지《백년어》7호

by 히요

여행의 시작부터 선택이다. 넉넉하지만 크고 무거운 가방이냐? 작지만 가벼운 가방이냐? 생활에 필요한 작은 소품들을 담았다 옮겼다. 어깨에 걸쳐본 후, 결국 나의 선택은 작은 가방. 충분히 담겼고 무겁다. 챙이 달린 모자도 하나, 자그마한 손가방 하나, 먼지 앉은 필름카메라, 우산에 물병까지 챙겼으니 이제 출발이다! 어제 비로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햇살은 뜨겁다. 시작하기엔 최고의 날씨네. 전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산은 초록이고, 나는 이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저곳이 아니라 여기지금에서 다음 순간으로, 익숙함에서 낯설음으로, 진짜 나에게로.



이 세계와 우주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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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항상 마주치는 인연이 있다. 참 신기하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반가운 얼굴. 마음으로 웃는다. 정성으로 내린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느즈막히 동물원으로 갔다. 해가 질까 서둘러 일어서니, 가지고 갈 수 있게 커피 한잔을 더 챙겨주신다. 다음에 또 들러요. 버스번호도 정류소도 낯설지만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 나의 얼굴에 노을이 진다. 도심에서 떨어져있는 산 아래 저만치에 입구가 보인다. 해는 서쪽으로 기웃, 하늘이 회색빛이었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관찰하는 동물들은 무심한 눈으로 멀리 산 쪽을 바라보더라. 어슬렁 걷던 곰 한마리. 서로를 바라본 그 순간 울렁이던 잔잔하지만 뜨거운 물결. 그들을 보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았던 순간. 우리사이의 저 답답한 창살이 웃기지? 누가 누굴 가둔건지, 구경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여러 날 동안, 도시구석의 쿰쿰하고 어색한 여관에서의 밤들이 이어졌다. 손으로 빤 양말 한 켤레를 옷걸이에 널어두고는 티비를 보다가 잠든다. 매일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4일인가 5일째 되는 날, 선암사 가는길. 한발 두발 땅을 디디며 걸었다.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묻지 않았다. 숨을 헐떨이며 주변을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걷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어. 그냥 내 속도로 천천히 가다보니 만나게 되더라. 나의 정상은 산중턱 암자가 아닌, 돌아 나오는 입구 쪽에 있던 조그만 커피가게.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내겐 정상이었다. 달달한 한 잔의 커피를 위해 난 세 시간을 열심히 걸었다. 목표는 달랐지만 서로에게 충분히 멋진 길이었다. 그 걸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때문에 잎싹은 모든 것을 빠트리지 않고 기억해야만 했다. 간직할 것이라고는 기억밖에 없으니까

_마당을 나온 암탉


버스창문 밖의 풍경이 생활과 가깝다. 사람들이다. 골목을 사진 찍으려다 혼도 났다. 누군가는 내게 말을 건다. 가끔 불편함에 움츠러들던 나. 바지위에 치마 입은 내모습이 웃긴다며 하하하 웃던 할머니의 웃음에 멋쩍어했던 나도 만났다. 길을 모를 땐 물어가고, 헤매다 길의 끝에서 다시 돌아 나오면서도 씩씩하게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나게 된 길. 세상에 없는 곳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오름에 하얀 말이 풀을 뜯고 있다. 불그스름한 흙과 말똥이 내딛는 발끝마다 보인다. 도시였다면 미간을 찌푸리며 피하기 바빴겠지? 고사리장마로 수증기 가득 머금은 공기 속을 걸으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사뿐해진다. 연둣빛 잎들이 형광으로

빛나고 쭉 뻗은 나무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곳. 필름으로도 담을 수 없는 그날의 풍경을 내 몸에 새겼다. 야생의 숲을 지나고, 자갈이 깔린 흙길도 지나 넓게 펼쳐진 차밭이 보이니 겨우 도착이다. 인적 드문 길을 걷다 지치면 잠시 앞에서 쉬어주고, 힘내서 걷자 다독여준 친구들이 고맙다. 참 많이 걸었다. 내가 세상과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었다. 달리는 버스 안, 음악 속에 앉아서 생각을 펼쳤다. 오랜만에 편하다. 도시의 모퉁이를 여행하며, 내가 얼마나 도시문명에 익숙해져 있었나 싶어, 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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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충분히 괜찮다. 그래서 더 좋다


그리고 여행의 끝물.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우선 우체국에 들러 어깨의 무거운 집을 집으로 먼저 보낸다 삶의 무게만큼을 등에 지고 다녔던 시간들.지금 내 짐이 딱 이만큼이다 생각하며 버텨왔지만 사실 무거웠다. 쨍쨍한 날씨와 싱싱한 브로콜리 모양의 산들과 어린이날 비누방울, 약간의 배고품과 피곤함,

커피 한 잔과 휴식, 그렇게 하루하루를 의식하면서 지내는 게 여행일까? 난 그냥 지금 여기 이곳에 있음만을 생각하고 지금 내 곁의 사람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그동안 참 자주, 촌스럽게 옛날을 얘기해온 나지만 결국 선택은 익숙한 것. 그것이 마을이고 음악이고 숙소이고 음식이든... 바다 위 배안에서, 낯선 동네 우체국 앞에서, 돌아갈 곳으로 엽서를 부쳤다.

높게 뜬 비행기 안, 구름 위에서 아주 작은 세상을 보았다. 어릴 때 나는 구름이 하늘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빛나는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아주 잘 잊어야 필요할 때 묘맥이 되어 돋아난다고 하였지. 여행에서의 기억을 맑은 빛 속에 뿌렸다. 허공으로 퍼진 내 기억들이 일상 속에서 잘 돋아나길 바라보며. 땅위에 쿵! 하고 닿는 바퀴와 슈-웅 내달리다 빠르게 멈추는 속도 속에서 나는 갑자기 현실로 되돌아왔다. 꿈이었나? 다행히, 우편함에 수북이 쌓여있다. 흔쾌한 나의 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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