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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요 Sep 16. 2023

낮은 상이 있는 집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어떻게 처음 보게 되었을까? 그 당시 최근 개봉작 중에 주목받고 있어서? 그 시절 누군가의 추천으로? 아니면 직감적인 취향으로 골랐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일이 더 많아지는 나이가 되면서 내가 본 영화의 목록은 느리게 채워지지만, 보고 또 보는 영화는 늘어났다. 잊을만하면 여름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나는 ‘히요취향’ 폴더 안의 영화들을 그야말로 보고 또 본다. 하지만, 달리 말해 나는 그들의 집에 가끔 놀러간다. 


 <여자, 정혜>가 사는 곳은 다세대 아파트. 시장이 가까이에 있고, 푸름이 무성한 화단이 있다. 글을 쓰는 엄마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 내부는 오래 쓴 살림살이로 채워져있다. 식탁 위 스테인드글라스 조명이 눈에 띈다. 김밥에 있는 오이를 젓가락으로 밀어 빼고 컵라면과 함께 식사를 할 때, 초인종이 울리고 택배가 도착한다. 알타리 김치를 박스 채로 열어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든다. 아삭 베어 무는 그 소리가 듣고 싶었다. 잘 익은 알타리 김치를 먹을 때면 나는 늘 이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고 정혜처럼 나도 한입 베어 먹는다. 얼마 전 마트에서 한 단에 3,500원인 알타리 무를 사다가 김치를 담았다. 잘 익혀서 더워지는 초여름에 맛있게 먹고 싶었다. “오늘 저녁 저희 집에 오셔서 같이 식사하지 않을래요? 그냥,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한 번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혼자였던 정혜는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상을 차려두고 그릇마다 랩을 씌워 기다리다 결국 오지 않은 그 사람과 함께 먹으려 했던 준비된 음식들 앞에 혼자 앉는다. 밥을 한 숟갈 떠서 먹고 앞쪽에 있는 접시부터 씌워 놓은 랩을 벗겨서 한 입씩 입에 넣는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그릇의 랩도 벗긴다. 랩이 그릇에서부터 떨어지는 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가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영화의 앞부분을 지나쳐 곧장 그 장면을 재생시키기도 한다. 반찬 통에 담아두지 않고 식탁 위에 그릇 채로 랩을 씌워둔다는 것은 곧 도착할 그 누군가를 위한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뚜껑을 완전히 닫지 않고 투명한 랩을 잠시 덮어 두는 마음을 나는 계속 보고자 했던 것 같다. 


 오래된 골목이 있는 동네에는 <와니와 준하>가 산다. 어릴 적부터 가족이 함께 살았던 그 집에는 마당이 있다. 키가 큰 나무 한 그루도 있는데,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와니와 닮은 곳이다. 어두운 톤의 나무와 베이지색 벽지가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 그래서 나도 오래 쓸 가구를 살 때, 괜히 어두운 색 나무 재질의 가구들을 골랐다. 계획적으로 잘 갖추어진 세트장 같은 그들의 집은 어느곳 하나 튀지 않고 가지런한 분위기를 내지만, 나의 현실은 제법 통일된 느낌의 가구들 사이에 뜬금없이 철제로 된 하얀색 서랍과 선반이 놓여있고, 그리고 <카페, 뤼미에르> 요코의 집에서 보았던 빛이 투과하는 하늘하늘한 체크무늬 커텐을 내 방에 달고 싶었지만, 두껍고 안 예쁜 체크 커텐만이 창을 어둡게 가리고 있다. 혼자 살기 좋은 크기의 방에서 빨래를 널며 하지메와 통화하는 장면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계속 돌려본다. 우리집 커텐과 요코의 방 커텐을 비교하면서. 

 

 몇 편의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국화꽃 향기> 희재의 집에 있는 낮은 상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와니의 집에도, 요코의 집에도, 정혜의 집에도 모두 낮은 상이 하나씩 있다. 낮은 상에 앉으면 무릎이 아파서 요즘은 의자를 선호하지만, 나는 여전히 낮은 상을 좋아한다. 언젠가 바닥에 앉으면 관계가 평등해지는 것 같다는 한 사람의 말이 기억났다. 그것보다 바닥에 낮은 상이 하나 있다면, 바닥의 면적이 허락되는 만큼 많은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의자 하나에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것과 달리 바닥은 경계가 없다. 그리고 맞닿아 있다. 무릎이 스칠 수 있는 거리에 앉게 된다. 자신의 몸 크기만큼을 차지하며 서로 이웃해 앉는 것은 지향해야 할 공동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엌이 있고, 음식을 먹고 살림살이가 보이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보통은 그런 영화들의 음악도 언제나 좋았다. 이미 오래전의 풍경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그녀들의 집은 현재의 내 삶에 영감을 준다. 집을 좋아한다. 주거지의 역할로서 집이라기보다 가장 편안하고 취향 중심적이고 내밀한 곳이면서, 생활 이상의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서 집을 가꾸고 살림을 살아보고 탐구를 해보고 싶다. 나의 방들은 계속해서 열리고 있다. 생각다방으로, 히요방으로, 나중엔 그 방들이 모여 어떤 집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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