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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요 Sep 16. 2023

H.O.T. Fan 이라는 장르

 화면 안 쪽으로 멤버가 한 사람씩 도착할 때, 내 심장은 평소보다 확실히 빨리 뛰고 있었다. 호들갑을 떠는 진행자들 사이로 그들의 상기된 표정과 감정은 전파를 타고 며칠 뒤 나에게도 전해졌다. 17년도 더 된 옛날 기억이 바래진 채로 2018년 2월에 찾아왔다. 사회적으로 기억되는 숫자들이 있다. 518, 419, 416. 그리고 H.O.T.팬 사이에서만 기억되는 숫자가 있다. 0907,2357,918,227,23,27,35,07,48. 


 잡지에 적힌 펜팔 주소로 얼굴 한번 보지 않은 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서로의 생일을 챙겼다. 한두 명은 가끔 콘서트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연락을 했는데, 그렇게 전국에 팬 친구를 사귀면서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그들과 가끔 통화를 하면서 중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표준말과 사투리가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된 것이다. 사투리가 괜히 부끄러워서 그들의 말씨를 흉내 내며 통화를 했다. 어쩌면 괜한 자격지심에 그 시절 내가 말을 자신 있게 못했던 건 아닐까(내 기억 속에 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서울말의 압박에서 벗어난 건, 그 후에 서울에서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생활을 하다가 다시 본가로 돌아 왔을 때이다. 그러니까 그 속에 살면서 내내 불편한 말투로 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과제를 발표하면서 힘들었다. 편한 고향에 다시 오니 누구도 나의 사투리를 신경 써서 듣지 않았고, 그게 나는 좋았다. 돌아돌아 겨우 나는 나의 말투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목구멍 아래에서 솟아 오르는 말들을 꾹꾹 눌러가며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일까? 요즘도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때면 파르르 목소리가 흔들린다. 처음엔 그것도 부끄러워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준 사람들이 있어,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티비나 매체에 나오지 않는 멤버들의 사생활이나 그들이 했던 말들, 그들이 좋아한다는 음악,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의 애칭, 반려동물의 근황까지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생팬들 덕에 지방에 있는 나도 팬카페를 통해 정보를 얻고 친구들과 나누며 즐거워했다. 학교 말고 다른 소속이 필요했던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이 팬이 되기로 결심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커뮤니티 활동을 했다. 


 나는 어린 시절을 김해에서 대부분 보냈는데, 문화의 집이라는 곳이 있었다. 인터넷이 지금만큼 빠르지도 보급이 많이 되지도 않았던 1990년대 후반에 그곳은 나에게 늘 좋은 놀이터였다. 씨디나 테이프를 빌려서 들을 수 있었고, 책도 꽤 많이 있었으며, 특히 친했던 친구들과 모임장소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눈을 피해 비밀일기를 교환하기도 하는 장소) 메일 계정을 난생 처음 만든 곳도 그곳이다(아이디가 lubwony인데 러브워니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H.O.T. 팬 친구들과 팬클럽 소식지처럼 우리들의 잡지를 만들었던 일. 학교마치고 떡볶이 먹고 가서 회의도 하고, 프린트도 하고, 그걸 엮어서 각자 나눠 가진 경험. 누구는 그림을 그리고 누구는 글을 쓰고 누구는 소설을 쓰고 누구는 편집을 하고 누구는 인쇄를 하고. 맡은바 역할을 승호부인, 칠현부인, 재원부인, 우혁부인, 희준부인들이 했다. 역할이 겹치면 안되기 때문에 잡지를 만드는 멤버들도 각 멤버 당 1명,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기가 많았던 강타나 승호부인은 둘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줄곧 재원부인. 학교에서도 이재원팬 하면 나를 떠올릴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에 있었던 이재원이지만 나는 제일 좋았다. 화면 맨 가장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키 큰 사람, 말없이 가만히 있는 그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배경 같은 사람. 하지만 이재원을 빼고 H.O.T.는 성립될 수 없는 한 사람만큼의 존재. 해체할 때까지도 나는 이재원 팬이었다. 독점할 수 있어 좋았다. 잡지를 나눠 가질 때에도 나는 언제나 몇 장 더 가질 수 있었고, 내 자리는 항상 주어졌다. 언제나 재원부인의 자리는 자주 비어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좋아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거 남들이 좋아하게 되면 싫어지는 욕심 같은 거였나. 


 내가 부모님 댁을 나와 독립하게 되면서, 상자에 빼곡히 모아둔 H.O.T. 굿즈들을 마음먹고 버린 적이 있다. 틱톡이라는 음료수 캔까지 모아놓았던 나의 굿즈 창고를 과감하게 다 정리하지 못해서 지금도 그 시절 하얀 팬클럽 단체복이나 팬들과 주고받은 편지, 멤버들 이름이 적힌 명찰은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지만, 녹화테이프와 브로마이드, 사진들을 다 버렸다. 모아도모아도 부족했던 그 때 나는 무엇을 모았던 것일까?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씨디나 테이프, 음악이 앨범으로 구축되어 있던 시절부터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만의 감각이 있는 것 같다. 랜덤플레이 방식, 빅테이터 시대에 알아서 추천음악 찾아주는 지금과 다르게 곡과 곡이 이어지는 멜로디가 자연스레 떠오르고, 감각적으로 기억하여 전체 곡들이 하나의 리듬을 이루고, 음악을 만들고 배치한 이들의 의도에 맞든 아니든 우리는 각자의 리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앨범을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H.O.T. 1집부터 5집까지 전곡을 내 몸에 새겨놓았다. 여전히 나는 모든 가사를 98% 정도는 완벽하게 외우고 있다. 도입만 들어도 어떤 곡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좋아했던 적은 그 이 후로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이 돌아왔다! 2018년 10월 13일, 14일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다. 온나 축제 준비로 한창 바쁘던 날이었지만, 고등학교때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닌 친구와 서울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야광봉과 흰 우비를 사기 위해 긴 줄을 늘어섰고 3시간은 기다려야했지만 지치는 기색없이 들뜬 표정들을 보았다. 무엇이었을까? 우리를 그토록 열광하게 만들었던 것은? 해가 지고 무대에 다섯명이 함께 오른 모습을 보는 순간, 17년의 기다림은 1초보다 짧은 시간으로 잊혀졌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눈물 짓고 함께 풍선을 흔들었던 그 때로 돌아간 마음.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



ps. 

그 후 나는 잔나비 팬이 되었다고 한다. ㅎㅎㅎㅎ (덕질 역시 중독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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