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듯 어려운 그것
변수 1. 나 홀로 vs. 함께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뭐랄까,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사실 여행을 이타적으로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하는 여행은 온전히 나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나만의 시간이다. 간혹 친구나 엄마와 가던 여행도 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대부분의 여행은 혼자 하게 되었고 그게 편하고 좋았다. 조력자 없이 다양한 상황을 혼자 겪어냄으로써 경험하는 일종의 성취감이 있었고, 남들 모르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음껏 만끽하는 데서 오는 뿌듯함도 있었다. 일상에서 타인과 함께할 때 아무리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작동시켜야 할 눈치나 예의바름이 피곤했기 때문이었을까, 불필요하게 의식해야 하는 부산물들이 없는 여행의 시간은 나에게 덮고 지내던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했다.
함께 하는 여행은 우선 조금 더 안정적으로 계획하게 된다는 점에서 무리하지 않게 되고, 물리적인 한계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 처리할 수 있어 개인적인 피로함은 덜해서 좋다. 하지만 머리가 두 개인만큼, 마음도, 감정도, 욕구도 두 개 이상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경우의 수가 많아지기도 하고, 선택을 어렵게 하는 약점도 더 많아질 수 있다. 의견의 관철은 항상 욕구의 상대적인 비교에 의한 결과이므로 소통하고 협상하는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다. 내 맘이 다른 사람 맘과 같지 않다는 것이 여행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결혼을 통해 다른 존재와 한 주머니 안에 담기게 되면서는 여행에 있어서 많은 선택지가 있지 않게 되었다. 여행에서 나타났던 나의 독립적인 성향은, 함께 동거하며 생활하는 사람에 대한 의존성으로 인해 흐려지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 행하는 게 편안하게 느껴지던 나는 조금은 더 소심해지고, 어느샌가 '일손을 나누는'일이 편안해졌다. (뭐든지 함께 하는 것이 좋다는 주의의 내 옆의 사람의 성향 탓도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나 홀로 여행이 그립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과 놀라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과거의 나는 어떻게 혼자 모든 것을 해온 것일까 하고 말이다. 나는 용기를 잃어버린 걸까, 다른 종류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 더 용감해진 걸까.
변수 2. 자연 vs. 도시 / 쉼 vs. 액티비티
여행의 종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서 문득 나는 어떤 여행에서 만족스럽고 편안함을 느꼈나를 되돌아보았다. 여행을 분류해보면 크게 여행의 장소인 "자연" 혹은 "도시", 그리고 여행해서 하는 일인 "쉼"과 "액티비티"로 나눌 수 있다. 2 x 2의 경우의 수들로 정리해본다면, 자연에서 쉬는 여행, 자연에서 액티비티를 하는 여행, 도시에서 쉬는 여행, 도시에서 액티비티를 하는 여행이 될 것이다. 나에게 선호도를 매기라면 자연 액티비티>자연 쉼>도시 액티비티>도시 쉼의 순이다.
모든 종류가 다 좋아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수 있지만 어떤 여행이 끝난 뒤에 정말 좋은 느낌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는지 떠올려보면,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타입이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잘 닦여진 도시의 길과 풍경, 높고 세련된 건물과 구조물, 대중교통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거리의 모습,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 먼지가 약간 낀 갤러리 바닥의 냄새 같은 것들이 그립다면 아마도 도시형 여행자일 것이다. 이슬에 젖은 풀 냄새,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울퉁불퉁한 바닥의 감촉, 약간의 땀이 나는 몸의 활동감,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그리워한다면 자연형 여행자임에 틀림없다. 몸이 애지간히 피곤해도 여행 중에 늦잠을 자지 못한다거나, 계획에 맞춰 바빠 움직이고 있다면 ‘액티비티’ 형 여행 선호자에 가까울 것이며, 여행 중 시계를 거의 보지 않는다거나,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걷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한다면 '쉼' 형 여행자일 수도 있겠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자연 액티비티 형] 여행자인 나는 제주도를 참 많이 좋아하고 특히 제주의 깊은 자연 속에서 거닐었을 때에 비로소 그곳을 만끽했다는 느낌을 누릴 수 있었다. 몸을 움직여야 만족이 있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을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행에서조차 바쁨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 자신이 서글플 때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은 나에게 그저 공간의 일시적인 이동일 뿐이었다. 직접 밟고 듣고 보고 느껴야만 내 기억에 새길 수 있는 무언가로 남는다. 그걸 위해 부지런함을 감수할 뿐인 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행을 끝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한 뒤, 현실의 텁텁함을 추억으로 달래 보려는 미래의 나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최근에 알게 된 점은 나의 제주 여행이 반복하면 할수록, 조금 더 정적이 되어 가고 간소화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하루에 이곳도 저곳도 다 가보며 최대치를 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면, 이제는 하루에 한 두 곳이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움직이게 된다. 체력이 부족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이전에 비해 게을러진 탐구욕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좋은 곳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곳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생각해서, 마음속으로 고르고 고른 곳만 방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미 제주는 '알만큼 아는 곳'이 돼버린 걸까.
바다도 그렇다. 빌딩이 가득한 회색 도시에 막막하게 갇혀 있을 때야 물 색이 그립고, 물가가 신선한 법이다. 모든 것이 푸르고 푸른 곳에서는 어딜 가나 푸른 것이 넉넉하고 헤퍼서, 그 가치에 대한 인식 체계가 올바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 걸까? 아니면 내 눈에 씌인 순수함의 콩깍지가 드디어 벗겨져버린 걸까. 이제는 그저 인스타에서 아무개가 추천해주는 힙한 까페와, 배를 채워줄 가성비 좋은 적당한 맛집을 전전하는 뻔한 여행자가 돼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며 마음이 울렁거린다.
익숙함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처음처럼 여행을 즐길 수는 없을까? 좋은 여행의 조건이란 계속해서 갱신되어야 할, 여행자의 고민거리인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여행을 좋아한다고 부끄럼 없이 말하려면, 늘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과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강렬한 끌림을 준비해두어야 할 성싶다. 전날 급하게 싼 짐처럼 허겁지겁 싸서 꼭 한 두 가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미리미리 준비해두어 든든한 여행 보따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