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ENTJ형 리더와의 면담
글 서두에 미리 말하겠다. 그런 것은 없다.
무례함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일방향성을 가진 단말마적인 행동이고 잘 변하지 않는 개인 인격의 발현이기에 이에 반응하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사건을 낳는 것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대처나 해결은 어렵다는 쓰디쓴 말로 시작할 수밖에 없음이 한스럽다.
어찌 되었건 오래간만에 직장이 배경인 오늘의 이야기에는 주요 등장인물이 4명 등장한다. 실무자 3명과 상위 리더 2명. 실무자 민경, 윤희는 같은 부서 소속이자 부서장인 철수의 관리 하에 있다. 또 다른 부서의 실무자 현영은 윤희와 협업하는 관계이며, 수현은 해당 부서의 부서장이자 현영의 리더이다.
신규 서비스 런칭을 앞두고 현영은 다소 까다로운 이슈들에 대해, 업무 담당자이자 협업 대상인 윤희에게 사전 검토 및 의견 요청을 넣는다. 윤희는 성심성의껏 이런저런 의견을 작성해 메일로 건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급하게 요청한 것 치고는 2주간 아무런 회신이 없다. 잊어버리려던 찰나, 현영에게서 메신저로 연락이 온다. 윤희는 전달했던 검토 의견에 대한 피드백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안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일방적 통보를 받는다. 사연을 들어보니 현영의 부서장인 수현이, 윤희와 같은 부서의 민경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민경에게 개인적으로 의견을 구해서 받은 안이란다. 원래 업무 담당자인 윤희는 머릿속에 새까매지는 기분이 차올랐다.
‘아니, 대체 이건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
일반적으로 협업이라는 것은 협업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상대방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민망한 듯 죄송하다는 말을 대신 건네는 현영 앞에서 윤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떠한 사과도, 양해도, 지금껏 쌓아온 업무 관계에서의 모든 전제들이 엎질러진 물처럼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대로 넘어가기엔 얼마 세워본 적도 없는 자존심이 너무도 아팠다. 이게 단순히 일을 뺏긴 것에 대한 분한 마음일까? 아니야, 윤희는 업무의 연속성이나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이슈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런 식으로 담당자 외에 결정에 영향을 주는 일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해본다. 검토 의견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다면 직접 담당자에게 말을 하고 조정해보는 방법도 있고, 정 안되면 부서 전체에 공론화해서 다 같이 논의해봐 달라고 요청할 수 있지 않냐며 뒤늦게 항의를 해 본다. 현영에게 돌아온 대답은 처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서장님이 그게 제일 맘에 드셨나 봐요…. 죄송하게 되었어요.”
윤희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직위를 이용해 프로세스와 업무 권한을 뭉개버리는 지인주의와 자기 느낌 기반의 의사 결정 과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또한, 2주 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이 일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던 민경에게도 신물과 실망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민경에게 직접 따져 물을 수도 없잖은가? 업무를 하면서 감정이 상하는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이건 혼자 떠안고 가야 할 문제는 아니다 싶은 거다. 직속 리더인 철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면담을 요청한다. 철수는 기분이 나쁠만하겠다며 바쁜 일과를 쪼개어 면담에 응한다.
(회의실에서 만난 철수와 윤희)
윤희: 여차저차 이러저러해서 개인적으로도 몹시 기분이 나쁠 뿐 아니라 공식적인 저희 업무 프로세스까지 무시당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철수: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윤희: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그쪽 부서장에게 꼭 언급해주십시오. 그리고 민경님에게도 이 일과 관련된 추후 업무는 도맡아서 하라고 말씀드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리더님, 저에게 있어서는 커리어 전체를 두고 고민할 정도로 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사건입니다. 제가 요청드린 최소한의 사항이 충족된다고 해도 이 일이 없어지지 않겠고, 저는 저대로 크게 상처받았습니다. 제 직무적인 전문성을 100% 인정받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존중이란 게 안된다면 정말 일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 리더님이라면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제 평가자가 아닌 회사 선배로서 조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철수: 흠.. 커리어적인 고민이 있었던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직무 변경도 신청한 적이 있으셨는데, 제가 이제야 대화를 하게 되었네요.
그런데 윤희 님, 윤희 님은 부서 내 다른 분들에 비해 본인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해요?
윤희: (당황하고 멍함) 녜?! 뭔가 제 강점을 ...... 이야기해야하는 상황인가요?
철수: A님은 이런걸 잘하고 B님은 이런걸 자신있다 하셔서 각자 큰 덩어리의 업무를 맡겨드렸는데, 윤희님은 일상적인 업무 외에 크게 두드러지게 성과를 보이신 게 없는 듯 해서요.
윤희: ......
철수: 아이고, 내가 맘을 달래드린다고 불러놓고서는 또 잔소리만 하네요. 회사 선배로서 이야기해달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네. 근데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으려면 사실 저런 결과물들이 필요해요. 그리고 윤희님, 보통 일찍 출근하시고 일찍 퇴근하시던데.. 나도 뭐 쌍팔년도로 돌아가자는 이야긴 아니고, 근태도 좀 더 노력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오후 시간에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던데.
윤희: .....
철수: 같은 파트 OO님 같은 경우는 키워드 하나만 던져줘도 혼자 엑스트라로 연구하고 정리해서 수십페이지로 피피티를 만들어오잖아요. 나도 깜짝 놀랬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아, 뭐 내가 윤희님이랑 비교를 하려는 건 아니고....
윤희: .. 아 ... 네....
근데 사실 그분과 저는 업무 권한 자체도 너무 다르고,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의 업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철수: 정해져 있는 업무 말고 자기가 빈틈을 찾아서 하는 일을 하는게 스스로를 차별화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윤희: .. 아... 네.. 그렇죠....
철수: 나도 아무도 손대지 않은 영역을 꾸준히 건드리고 발굴해서 그게 내 담당 업무가 되었고, 회사 내에서 인정을 받게 된 경험이 있어요. 그런건 언뜻 보면 해도 안될 것 같은 일들이 대부분이구요.
윤희: ......... (머릿 속이 멍해진다.) '오늘 주제가 이거였던가?'
그리고 철수는 마지막으로 업무에서 감정을 느끼지 않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상황에서도 내가 고칠점이나 새롭게 배울 점은 없는지 늘 돌아보는 습관을 가지는게 멘탈 관리의 방법이라고 조언해준다. 자신의 강점은 사과가 빠른 것, 그리고 얼마든지 저자세를 취하고도 일을 성사시키는 역량이란다.
철수: 어 윤희님 죄송한데, 제가 지금 회의 시간에 늦어서..... 민경님한테는 제가 아까 말한거 전달할게요.
윤희: ..아 ...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시간 후 민경은 급히 영희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며 연락해왔고, 윤희는 예의 그 사과를 받았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된 점, 별 생각없이 나눴던 대화가 최종안이 될줄 생각도 못했다며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다고 ...많이 당황스러우셨겠다며 사람 좋게, 그러나 지시받은 사과를 건네는 민경이 정말로는 어떤 사람일지 윤희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은 직장에서 겪은 무례함에 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고, 어느 누구에게 득도 없는 결과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