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의 달빛을 만나다
딴딴딴딴..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머릿속에 흐른다. 이곳과 저곳은 죽음과 삶 사이의 간극과 같은 거리감. 운명을 나누는 결정적 선택만이 내 손에 쥐어졌다. 그래, 차 좋은 게 뭐냐. 돌아가자. 돌아가서 속 시원히 물건을 받고 다시 다음 목적지로 향하면 그만이다!
경로 중간에 보이는 호수가 목적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벌써 두 번째 이 호수를 지나고 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트러플 헌팅을 가기 위해 1번, 다시 돌아가기 위해 2번, 목적지로 향할 때 이 근처를 세 번 지나치겠지.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를 세 번 외치고 운전대를 다시 잡아본다. 까이꺼 3시간, 별 거 아니지. 씽씽 달려 근방까지 도착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들을 지나, 아는 길이니 빨리 도착할 줄 알았던 아그리뚜리스모 앞 5km부터는 무슨 일인지 산악 사이클 경기(?)가 열리고 있다. 경찰까지 나와서 숙소로 향하는 초입부터 교통정리를 하고 있고, 사이클을 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끙끙대며 도저히 자전거로는 지날 수 없을 것 같은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이를 악물고 사이클을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차 속에 있는 나로서는 상당히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속도를 내도 그들의 코와 입으로 길의 흙먼지가 들어갈 테니 양보하고, 양보받고를 반복하며 슬슬 기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0분 걸릴 거리를 20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아, 다시 만난 마틸다 아주머니와 아그리뚜리스모. 아무래도 나는 이곳이 너무나 좋았나 보다. 마음에 밟혀 한번을 더 오게 되었나 보다 하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체크인할 새로운 손님들을 위해 방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데, 도저히 곧바로 다시 운전대를 잡을 힘이 없었다. 아주머니께 조심스럽게 여쭸다. 너무 오래 달려와서 그런데, 커피를 나에게 팔아주지 않겠느냐고. 아주머니는 흔쾌히 조식용 식당으로 가서 에스프레소 기계를 켰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웃돈을 주고 비용을 지불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커피는 너무 맛있었고, 순식간에 에스프레소 두 잔을 들이켰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니 좀 살 것 같았다. 아주머니께 감사의 인사와 함께 돈을 건네려는데, 아주머니가 웃으며 돈을 받지 않겠단다. 선물이란다. 나는 두 눈이 똥그래졌다. 앗,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가뜩 스스로의 바보 같은 실수에 자책하며, 얼이 빠져 있다가, 갑작스러운 따스한 친절을 마주해서 약간 눈물이 나려고 했다. 고맙다는 말과 촉촉한 눈 말고는 아주머니께 드릴 게 없었다.
이 순박하고 친절한 농장 주인아주머니와 몇 번이고 감사 인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야 겨우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이제는 지체 없이 다음 목적지인 볼셰나 호수 근처 숙소로 향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참으로 다정하고 열정적이지만, 이탈리아의 도로는 거칠고 험악하기 짝이 없다. 자비가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위 지도의 왼쪽 경로를 보면 엥? 별 것 아니구먼, 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도를 줌 인 해보면, 저런 갈 지자 모양의 말도 안 되는 급회전 구간이 끝도 없이 이어져있다. 코너마다 속력을 늦추고 몸이 흔들릴 정도로 핸들을 꺾었다가, 다시 반대로 꺾는 이상한 모양새가 연출된다. 마음을 놓을 새가 없다. 글자 그대로 긴장의 연속. 산길과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는 흙바닥길이 쭉 이어져있다. 이 길로 가는 게 맞는 거야?라고 역시 의심이 될 때쯤 만나게 된 다음 장소. 그라돌리 근처의 한 시골 마을이다.
숙소 주소를 찍었더니 웬 밭이 나오더니, 구글 맵이 이끄는 대로 갑자기 주택 부지 안으로 들어가 버린 나.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몇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이탈리아어로 이어갈 말이 없어 여기가 아닌가벼, 하면서 나가려는데 한 여자분이 나와서 여기가 아니라는 듯 건너편 집을 가리킨다. 아, 내가 잘못 찾았나? 죄송해요. 하고 돌아서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숙소 주인이었던 것. 자기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 쪽의 휘향 찬란한 독채를 임대 숙소로 운영하고 있는 듯했다. 재미있는 건 왓츠앱이나 숙소 예약 앱에서는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데, 실제로 영어로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마 번역 기능을 사용하는 듯하다.) 어찌어찌 숙소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듣고,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앱으로 연락하란다.
숙소에 짐을 두고 나와 굽어보니 산과 밭, 그리고 저 멀리 호수의 끝자락 같은 게 보인다. 갑자기 여기가 어딘가? 나는 왜 이곳에 온 걸까? 하며 미묘한 감정이 든다. 내가 계획한 여행인데, 나는 나 스스로에게 등 떠밀려 온 것 같기도 하다.
'여긴 정말 나 말고는 한국인이라면 아무도 여행 오지 않을 곳이군.'
이런 생각을 하며 뿌듯해하는 내가 웃기기도 하고, 여하튼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늦은 오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조용한 지역이라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너무 오래 앉아서 운전만 한 것 같아서 잠깐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싶다. 찾아보니 걸어서 15-20분 정도면 호숫가에 다다를 수 있는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는 시간이라 살짝 겁은 났지만, 뭐 별 일 생기겠어.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섰다. 길은 확실히 희한했다. 차가 다니는 도로 밖에 없는 길을 따라 조심히 걸어가본다.
완전히 혼자가 된 기분. 가끔 지나는 차들 말고 여기에는 나 밖에 없다. 누군가는 외롭다고 느낄, 또 누군가는 자유롭다고 느낄 이 장면. 나는 동전의 양면처럼 둘 다 100%였다. 모르는 길을 걷지만 또 왠지 두렵지만은 않은 기분이다. 아마도 하늘의 빛깔 때문이 아닐까. 오늘 밤만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따뜻하게 여울진 색감이다.
시골은 해가 더 빠르게 지는 것 같다. 사진도 찍고 구경하면서 천천히 걷긴 했지만 벌써 시야가 어둑어둑해지는 기운이 느껴진다. 어두운 주택가 옆을 지나는 데 갑자기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다가오는 무서움을 쫓아내고 싶어서였는지, 크게 소리 내서 불러도 아무도 불평하는 이 없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는지 한참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데, 바로 뒤쪽 집에서 아저씨 한 명이 나온다. 깜짝 놀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 혼자는 아니었네. 하며 차라리 안도한다. 지역주민 아저씨를 놀라게 해서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갈래길로 들어선다. 이제 여기서 한번 꺾어 조금만 더 걸으면 목적지로 삼은 호숫가 근처 지점이다. 방향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입에서 "헉" 소리가 난다. 그리고 할 말을 잊었다.
이게 무슨 광경인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 초현실적인 달을 만났다. 달이 어찌나 크고 밝게 떠오르고 있는지 보지 않은 척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아, 지금 추석이지! 그제야 생각난 달의 등장 이유. 나는 완전히 걸음을 멈춰버렸고, 내 옆을 지나가던 자동차도 그대로 천천히 멈춰 섰다.
"정말 아름답죠?"
"그러게요, 믿기지가 않네요."
차를 운전하던 어떤 남자와 나는 마치 원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누구였든 공감에 대한 충동을 이기긴 어려웠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의 강렬한 추억을 남겼다. 산머리를 치고 달이 높게 유영할 때까지 나는 그저 그 주변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뒤로는 달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달은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가는 길 위에 서있었다. 호수 옆을 끼고 걷기 시작했을 때, 달은 호수 위에 아주 길게 몸뚱이를 펼치고 그 밝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호수 물이 너무 잔잔하고 매끈해서 표면에 새겨진 달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까지도 들었다. 그 순간, 생각난 드뷔시의 달빛. 나는 음악을 불러오기로 했다. 유려하게 음악을 연주하는 스마트폰을 손에 끼고, 뒷짐을 지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이 산책이 너무 쉽게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을 담아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완벽한 온도의 이 밤은 내 인생 모먼트가 될 것이다. 시간은 내가 바란 대로 천천히 흘렀고, 음악은 아름다웠다. 혼자된 외로움과 자유로움의 정점이 이 호수 앞에서 펼쳐졌다. 낮에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달았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 달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이라는 운명적인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한번 더 펼쳐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백조 한 쌍이 나타나 유유히 호수 위를 헤엄치는 것. 백조를 호출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네들이 알고 여길 찾아온 걸까? 혹자는 백조들이 사람이 먹이를 줄까 싶어 다가왔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날 밤의 아름다운 신비로 영원히 남겨둘 생각이다.
시간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혼여행 중인 자로서 책임감 있게 귀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변은 완전히 깜깜해졌지만, 더 이상 길을 걷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날의 달은 내가 완전히 방향을 틀기 전까지 내 머리 위에서 길을 환히 밝혀주었다. 달빛에 글을 읽었다는 옛이야기, 또 옛날 옛적에는 가로등이 없었겠지만 달빛 덕분에 밤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난 이제 믿는다. 함께 걷는 모든 길은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