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몬테라노 근처 어느 숲에서
발도르차 평원을 누비는 토스카나의 여정이 거의 마무리되려는 시점이다. 자유 여행을 계획하긴 했지만, 중간중간 약간은 수동적인 활동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꽤 미리부터 예약해 두었던 에어비앤비 체험이 있다. 바로, 트러플 버섯 캐기 체험이다. 그것도 강아지들과 함께! 체험이라고는 하지만 이 똑똑하기 그지없는 강아지들이 버섯을 캐는 것을 구경하고 응원해 주는 활동에 가깝다고 평해야 할 것 같다.
트러플 버섯은 세계 곳곳에 군락지가 있는데, 아직 그 존재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곳들이 많다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프랑스의 화이트트러플, 이탈리아의 블랙트러플이 유명한 산지인데, 화이트트러플이 블랙트러플보다 양적으로 희소하다는 점에서 조금 더 값이 나가는 편이라고. 트러플이 특정 지역에서만 땅 속 깊이에서 포자로 자라나는 버섯이기 때문에 사람은 육안으로 찾아낼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트러플 채취는 가족 경영으로만 이어져 내려오는 굉장히 비밀스러운 사업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땅 속 버섯을 어떻게 찾아낼까? 전통적으로는 후각에 민감한 돼지들이 이 버섯을 찾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에는 이렇게 적합한 종의 개를 훈련시켜서 트러플 헌팅의 동반자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돼지보다 더 나은 이유는 돼지들이 버섯을 캐서 자기 스스로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들이 최종 생산물을 수확해 내는 데 훨씬 낫다는 것.
에어비앤비 앱으로 액티비티를 신청한 사람들이 오전 10시에 만나 함께 호스트의 차를 타고 헌팅 장소로 이동하는데, 미팅 장소가 내가 묵은 아그리뚜리스모에서 꽤 먼 곳이어서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만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운전 습관을 며칠 경험하면서는 절대 속력을 많이 내면서 이동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6시 반쯤 서둘러 일어나 일찍 요청해 둔 조식을 먹었다. 아그리뚜리스모의 아주머니께 감사했다며 마스크팩을 선물하고 후닥닥 출발했다. 다행히 도로 상황에 큰 문제가 없어 늦지 않게 도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사히 도착한 줄 알았지만..)
어쨌거나 만난 열댓 명의 사람들과 간단히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고 바로 호스트의 차를 타고 가 어느 숲 속에 내렸다. 차를 타고 갈 때는 몰랐는데, 차 트렁크에 개 두 마리가 타고 있었다. 까만 개가 웬디, 뽀글 머리 흰 개가 줄리에따다. 이들과도 통성명(!)을 하고 바로 숲 속 탐험이 시작됐다. 호스트는 사진 속 큰 바위 위에 앉아 트러플의 역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설사처럼 쭉 설명하더니, 헌팅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개들은 처음에는 딴청도 피고, 집중하지 못하는 듯하더니 신기하게도 호스트의 명령에 땅바닥 가까이 코를 대고 땅을 밟아 나갔다. 한참을 걸었을까? 약간 지루해질 찰나, 한동안 별 반응 없이 걷기만 하던 녀석들 중 한 마리가 갑자기 발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렇게 발로 파기 시작하면 호스트가 가지고 있는 곡괭이 같은 도구로 단단한 땅을 살짝 깨뜨려 주기도 하고, 트러플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다소) 거칠게 개를 밀어내는데, 파다 보면 개의 발톱에 트러플이 긁혀 버섯이 잘 상하기 때문이란다. 개들도 날마다 컨디션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채취량이 그때그때 다르다고 하는데 다소 노동적인 작업으로 보이긴 해도, 개들이 트러플 찾는 활동을 좋아하고 산속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어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위에 뽀글한 흰 개가 이 트러플 헌팅을 위한 공인된 종이라고 하는데, 번식, 양육, 훈련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계획적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어떻게 훈련하는지를 아주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몇 가지 들려준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개를 훈련하는 방식(행동 연합과 보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트러플 자체를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젖을 먹는 기간에 어미 젖꼭지에 트러플 오일을 바르기도 하고, 트러플을 먹이로 먹이기도 하면서 긍정 연합을 만들어나간다는 점이다. 그렇게 조금 트러플 찾기 활동에 익숙해지면, 이렇게 트러플이 있는 숲으로 나와서 다른 개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실전 연습을 꽤 오랜 기간 거친다고. 개들이 종종 엄청나게 집중하면서 바위아래쪽 냄새를 길게 맡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들이 트러플 찾은 거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호스트가 심드렁하게, 트러플 아닐 거라고 대답을 한다. 보통 너무 지나치게 재미있어하면 그건 트러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며, 개들이 놀기 좋아하는 도마뱀일 거라고 무심히 말한다.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일하는 건 적당하게 열심히, 적당하게 재미없는 것이로구나. 그래, 이 녀석들도 나름 일하는 중이었지.
트러플의 겉면은 아주 딱딱한 편이어서 손으로 쥐었을 때는 그냥 울퉁불퉁한 조약돌 같았다. 개들이 트러플을 채취해 왔을 때 호스트가 트러플의 단면을 잘라주면서 향을 맡아보라고 모두에게 트러플을 건네주었을 때,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아는 그 냄새, '트러플' 하면 딱 떠오르는 그 향, 값비싼 트러플 오일 파스타에서 먹어봤던 그 진득한 듯 개성이 강한 향은 나지 않았던 것. 오히려 아주 갓 따온 버섯 뿌리에서 날 것 같은 아주 프레시한 흙의 냄새, 숲의 은은한 나무 향이 깃든 냄새였다. 모두가 왜 그 트러플 냄새가 나지 않는지를 궁금해하자, 호스트는 그 향이 사실은 트러플 향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청중들은 점점 더 충격과 공포에 빠져가는 분위기. 우리가 대충 식당에서 먹는 그 트러플 오일에서 나는 향은 사실 인공향이 가미되어 제조된 향이란다. 어느 정도 브랜딩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소름이 끼쳤다. 윽, 마케터들은 대단하고 지독하다. 평생 그 향이 트러플 향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다가 지구를 떠날 뻔했네.
한 시간 정도 헌팅을 마치고 모두 함께 프로그램에 포함된 트러플 코스요리를 먹으러 호스트의 집으로 이동했다. 개들도 노동시간이 끝나고 해방을 맞았다!
그 뒤로는, 배부름과 호사라는 기억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요리를 먹었다. 트러플 가루와 조각과 오일은 호화스럽게 요리 위에 얹혀졌다. 이탈리안답게 재료 그 자체의 맛이 느껴지는 식사였다. 빵과 치즈, 햄과 감자, 파스타까지 트러플과 어울리지 않는 요리는 없었다. 겨우 오늘 만난 사람들과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혼자만의 여행 가운데 북적거리는 식사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앱으로 참여하는 활동의 특성상 (에어비앤비는 미국 앱이니)미국인들이 대부분인 활동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다양한 나이대, 다양한 직업, 다양한 이유로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사람들이었다. 또 문득 새롭게 느낀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세계 어디를 가도 누군가에게 낯설거나, 모르는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한국 음식 김치와 한국 술 소주, 한국 쇼프로그램을 이야기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나는 묘한 이질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모두들 한국에 여행을 와봤거나, 와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10년 만에 현실이 아닌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비현실적인 양의 트러플을 먹은 날이어서일까? 와인도 마시지 않았지만 몽롱히 취해서 트러플 헌팅은 끝이 났다.
이제는 집에 돌아갈 시간.
그런데 왓츠앱에 메시지가 와있다. 아그리뚜리스모의 호스트 아주머니 마틸다다.
"Dear XXX, in your apartment, you have left a beautycase.
Please come back to take. Thanks very much.
Matilde"
오, 마이 갓.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한다고 한 게 그만, 숙소에 현금을 넣어둔 캐리어 속 작은 파우치를 그대로 두고 온 것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근데 난 2시간 반을 넘게 달려와 로마 근처까지 내려왔는데? 여행 중에 짐을 두고 오면 보통 돌아갈 수가 없으니 포기를 하는 게 마땅하지만, 무시하기엔 꽤 큰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어떡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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