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여행의 의미를 확장하다
아그리뚜리스모에서의 아침을 열었다. 일출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잠들었기 때문일까. 해가 깨어나는 기운에 번쩍 눈이 떠졌다. 직감이 왔다.
'지금이야!'
카메라를 들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간다.
그렇게 파란 하늘과 어두운 산맥 뒤에서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이 차갑고 찬란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일출을 보아왔지만, 또 한 번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해는 영원히 동일한데, 주변에 걸리는 풍경이 달라지니 하늘 아래 똑같은 일출은 없다는 게 새삼 경이롭고 감사하다. 실컷 눈으로 풍경을 흡입하고 한 바퀴 산책을 돌았다.
안개가 살짝 낀 산맥과 평원은 아무리 사진을 찍어보아도, 그 모습 그대로 담기지가 않는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신체만큼 민감하고 디테일하게 작동하는 발명품은 없음을 다시금 느낀다. 누군가 어때?라고 물으면 구구절절 설명할 게 아니라, 그냥 직접 눈으로 봐! 하고 싶은 그런 장면이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어제 투어 루트를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내 발걸음이 지나는 소리를 빼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한적함이 좋다. 듣기 싫은 소리도, 소음도 없는, 아무런 소리를 낼 필요도 없는 곳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아 반갑다. 너무 좋아서인지 큰 한숨이 나왔다. 깊지만 무겁지 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숙소로 돌아왔다.
밥은 누가 차려주는 게 가장 맛있는 법이다. 조식시간이 7시 반이었는데, 대체 몇 시에 이러나 이렇게 풍성하게 준비를 다 하셨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시골의 아침은 빠르게 시작되는 가보다 싶다. 대부분 산지에서 나는 것으로 직접 만든 음식이 많았는데, 각종 잼은 직접 수확한 과일로 졸인 것이라고 하고, 베이커리는 아주머니의 어머님이 직접 구우셨다고 한다. 모든 것이 분업화되고, 자동화된 현대에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삶이라니, 하나하나 아직도 놀랄 것이 많이 있다.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독채로 있는 식당은 안 쪽 테이블이 여러 개 있고, 바깥 테라스 쪽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게 식탁과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침 기운이 생각보다 쌀쌀해서 밖에서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을 못 했는데, 이건 밖에서 안 먹으면 손해일 정도로 뷰가 멋졌다. 약간의 빵과 과일, 요거트, 카푸치노로 배를 채웠다. 이곳의 일상을 빌려 단출하고 행복한 아침 시간을 보냈다.
여유를 부리는 동안 해는 더욱 밝게 떠올랐다. 어제처럼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날은 시간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은 기어코 사이프러스 뷰를 사냥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특정 스팟이 신혼부부들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유명한 장소인 것 같은데, 이름이 'Val d'Orcia'란다. 구글 맵을 믿고 ‘발도르차‘를 목적지로 둔 채 농장을 벗어나 달려보는데, 돌아도 돌아도 도착할 수 없는 사이프러스 뷰맛집. 맵에서는 분명히 여기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곳은 도로만 나 있는 길 위다. 왕복 1차선 도로에 차들은 쌩쌩 달리고 하다 보니 목적지를 한번 지나치면 다시 유턴을 해오는 게 불가능하다. 그냥 길이 난 대로 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교차로까지 가야지만 같은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 하, 이거 난감하네.
날은 덥고, 햇빛은 뜨겁고, 네비가 알려준 목적지에 다다르고도 30분이 넘게 차에서 내리지 못하 빙빙 돌다가 지쳐버린 운전자가 바로 여기 있다. 결국 마음을 좀 내려놓고, 이 방황을 종료하기 위해 원하는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사이프러스가 비교적 빽빽이 심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에 무작정 차를 세웠다.
골목 어귀에서 내려, 남친이 타고 있는 차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아마도)러시아계 여자에게 한번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혼자 여행하는 게 대체로 아쉽지는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풍경과 나를 적당 비율로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보니 사진 찍힐 기회가 생기면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얼굴에 철판 깔고 아무나에게 부탁할 수 있는 당당함이 필요한 시점. 여러 개 찍었으니 확인해 보라며 자신 없는 듯 카메라를 다시 건네준 그녀가 떠나고 좀 더 안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중국인 커플이 이미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삼각대에, 셀카봉에 템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들. 한국 사람들 못지않게 사진에 진심인 것 같은 기색을 보니, 그들이라면 나의 사진도 잘 찍어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여자 친구를 옆에 두고 다른 여자 사진을 대신 찍어주는 게 혹시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몇 장 찍고 수줍은 척 그곳을 떠나 주는 예의까지 놓치지 않았다. 사이프러스가 멋지긴 한데, 찾아 헤맨 정답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약간 허탈해지기도 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자동차로 달리면서 원경으로 수십, 수백 그루의 사이프러스를 봤겠지만, 내가 생각하고 꿈꿔온, 예상했던 모습을 눈에, 카메라에 담지 못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 아닌가 싶다. 결국 나는 고흐의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어떤 모습이건 보이는 대로 보자! 그리고 내 방식대로 담아 보기로 한다.
누군가 그림을 잘 그리려면 잘 보아야 한다고, 예술의 시작은 관찰에서 온다고 했던가. 사이프러스는 뭉뚱그려서 대충 볼 땐 몰랐으나 가까이서 만져보고, 또 멀리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여느 나무와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특이하고 재미있게 생겼다. 얼핏 가느다란 솔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뾰족하고 기다란 초록 당근같이 생기기도 했다. 높이가 높아짐에 따라서 그 가지와 잎의 풍성함이 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외관의 본질은 나무가 겪어온 세월이다. 더 멀리서 보면 연필심을 무심히 박아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순한 모양새 때문에 여러 그루가 규칙적으로 심겨 있을 때, 훨씬 더 균형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다. 물론, 그림으로는 내가 보는 광경을 사진만큼 정확히 담을 수 없지만,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 내가 어떤 대상을 이해한 방식을 투영할 수는 있다. 한참이 흐르고 그림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응시한 시간, 그것에 들인 노력만큼의 시간이 담겼다. 흔히 천혜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더라도 슬쩍 보고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끝이 나는 경우들이 많은데, 더 깊숙이 기억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금 덜 효율적인 방식이 도움이 된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흩어지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저 흘러가버릴 기억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
사이프러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사이프러스를 찾기 위해 길 위에서 한참 방황했던 건 내가 봤던 누군가의 사진 속 사이프러스가 이번 여행을 계획할 때 우선순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그 예상을 충족하는 곳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앉아 생각해 보니 그 사진만이 사이프러스의 전부는 아니었고, 꼭 내 맘대로만 되는 일은 세상에 없구나 싶다. 또, 내가 처음에 설정한 목표와 그 결과보다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들이, 그 과정이 더 여행답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우선순위라는 건 아무래도 흔들려도 괜찮을 지도 모른다. 때마다 날씨가, 도로의 상황이, 내 컨디션이, 또 다른 무언가가 그 결과를 뒤흔드는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예상치 못한 순간을 위한 마법의 주문이 있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지!"를 외치고 어깨 한번 으쓱하고 씩씩하게 나아가면 된다.
결국 사이프러스가 다 일 줄 알았던 토스카나 여행은, 사이프러스를 찾지 못함으로 인해서 확장되는 역설을 맞이했다. 이곳저곳에서 우연히 잠깐씩 나눈 대화들 속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추천받은 뷰포인트들을 하나하나 방문해 보기로 한다. 누군가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고 했던가. 마음을 내려놓고 닿을 수 있는 곳에 닿아 멀리 내다보니 글자 그대로 어느 한 종류의 나무, 어떤 한 부분으로 대표되지 않는 토스카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토스카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넓고, 멀리까지 뻗어 이 땅의 사람들을 살게 하는 바탕이자 정체성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미식의 땅, 유명한 와인 산지, 누군가에게는 운전이 어려운 곳 등으로 라벨링될 토스카나겠지만, 나에게는 뜨거운 햇빛만큼 사랑과 에너지를 크게 품고 있는, 여유와 자부심을 지닌 땅이라는 결론을 지을 수 있게 됐다. 급하게 돌아갈 생각만 버린다면 얼마든지 헤매도 좋고, 끝없이 달려도 좋은 곳이라고 말해주는 땅, 토스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