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선으로 본 이탈리아 커피
극단적인 의존성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하루도 커피가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순전히 커피에 대한 호기심으로 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커피클래스도 수강하고, 커피가 맛있다는 곳이면 투어를 돌 정도로 한 때에는 커피에 상당히 미쳐 지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커피를 찾아보다 보면, 그 전래가 상당히 치열함을 알 수가 있다. 각 나라가 각자의 커피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정확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유럽 대륙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시작’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도 한 것이 커피콩을 어떻게 가공하는지에 대한 방법과, 우리가 마시는 최종의 ‘커피액’을 구현해 내는 데에 사용한 방법, 추출에 사용한 기구와 기술에 따라, 여러 갈래의 시작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도 에스프레소 머신이랄지 필터 드립퍼와 같은 수준의, 커피를 내리는 새로운 기구를 발명하면, 해당 방식으로 추출해 낸 커피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여러 갈래의 혼란스러운 내러티브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뽑아낸, 고압력의 스팀으로 내린 커피 역사의 시작은 확실히 이탈리아라는 점이다.(기술이 문화를 큰 폭으로 바꾼다는 말이 이런 점에서 동의가 된다.) 20대에 처음으로 접한 찐-한 커피의 맛, 아메리카노는 미국에서 건너온 것이었겠지만, 그 선조 격인 에스프레소의 나라 이탈리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커피와 그에 대한 이야기에 수다 떨듯이 소개해본다.
1) 이탈리아의 커피의 디폴트 값은 에스프레소다.
뭘 다 아는 사실 가지고 굳이 이야기를 하나 싶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cafe라고 이름 붙여진 메뉴는 전부 에스프레소이고, 가격은 일반적으로 1.5유로 정도로 책정되어 있는 것 같다. 관광객들이 많은 도시의 카페들에는 아메리카노 메뉴도 종종 보이긴 하는데, 여행 중에 주문해보진 않았다.(로컬 피플이 경멸하는 메뉴일 것 같은 왠지 모를 두려움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어딜 가나 에스프레소 한 샷이 1유로로 균일가(!)였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약간 가격이 인상된 것 같다고. 하여간 이게 또 재밌는 건 메뉴에 없는 커스텀 메뉴 같은 것들이 단골들 사이에는 있는 것 같다는 것. 에스프레소에 가게마다 있는 수제 크림을 한 스푼 얹어 달라던가, 우유 생크림을 추가한다든가 한다는 식으로 주문을 하는 모습을 봤다. 에스프레소 한잔을 주문할 때부터 가게를 나설 때까지 카페의 단골들은 바리스타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는 바리스타가 바빠지면 말없이 동전을 영수증 위에 올려놓고 유유히 떠난다. 이 모습이 왜 이렇게 시크한 듯 친근하고 간지 나 보이던지.
2)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오후에 마시지 않는다.
즉 아침 시간에만 카푸치노나 카페라떼를 마신다는 점. 이런 금기에 가까운 습관을 비웃는 숏폼 영상을 보기도 한 것 같다. 시곗바늘이 11시 구간에서 12시 이후로 넘어가자마자 라떼는 팔지 않는다고 다소 과장된 태도로 주문을 거부하는 카페 사장님의 콩트 같은 모습. ‘아침’이라는 시간이 무 자르듯 점심 나절과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여간 우유 들어간 커피는 아침에만 먹는 것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이라고. 아침 대용으로 라떼, 카푸치노 류를 마시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는 게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진한 에스프레소가 위장에 불편을 줄 수 있어서 좀 부드럽게 마시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 나라 사람들이 아침에 에스프레소를 안 마시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먹는 에스프레소 한잔과 크롸상 한 조각. 베이커리/카페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루틴 하게 들러 간단히 배를 채우고 속을 뎁히는 아침 방앗간 같은 느낌이었다. 나 또한 이 사실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전에는 카푸치노, 오후에는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꽤 괜찮았다고 느꼈는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습관이 오래 유지되고 있다.
* 부온콘벤토 주변 아그리투리스모에서의 커피: 주인집 아주머니의 손맛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샷
3) 이탈리아엔 아이스커피는 없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샤케라또라고 해서 뜨겁지 않은 음료를 팔고 있긴 한데, 이게 또 한국에서 먹는, 얼음 그득해서 이가 시릴 정도의 아이스 음료 느낌은 전혀 아닌 게 반전이다. 에스프레소 샷을 얼음과 함께 칵테일 쉐이커에 넣어 거품이 생길 정도로 잔뜩 흔들어서 주는 음료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밀라노 ‘Cafe Napoli’의 커피: 커피 샤케라또
여행 기간 동안 9월 말 10월 초의 시즌임에도 낮 햇살이 뜨거워 조금 오래 걸으면 땀이 지끈지끈 나곤 했는데, 이 온도는 남부로 내려올수록 더욱 극심해졌다. 밀라노에서 들렀던 한 카페에서 바리스타의 추천 + 더워서 무심코 주문한 샤케라또는 미지근보다는 살짝 더 시원한, 그러나 흡족하지는 않은 맛의 ‘아이스’ 음료였다. 도저히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닌 것 같고, 안 마신 것도 아닌 것 같은 찜찜함에 이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로 보이는 cafe con cremina를 추가로 한잔 더 주문했는데, 시키길 잘했다. 애매한 아이스 음료보다는 그냥 이 나라에서 맛있게 하는 음료를 먹는 게 백 번 낫다.
*밀라노 ‘Cafe Napoli’의 커피: 에스프레소 꼰 크레미나
한편, 그래도 얼죽아 파들에게는 유럽여행을 하면서 참을 수 없는 것이 아아에 대한 갈망이다. 아무리, 도저히 생각해 봐도 주문하는 게 불가능하다 싶은 카페에서는 살짝 잔꾀를 써볼 수 있다. 바로 에스프레소와 “얼음물”을 주문하는 것. 지불해야 할 비용은 1유로 정도 추가되긴 하지만, 거의 실패 없고 절대로 후회 없는 선택이 되리라 자부한다. (물론, 약간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필수이다. 이런 식으로 주문이 안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주문하기 전, 주문 후, 계산하고 떠나기 전 도합 세 번 정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탈리아인이 보기엔 외계인 같아 보일 것 같아서.)
*Cassino ‘Cafe Argo’: 바리스타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요구하는 여행자에 대처하는 법
이탈리아에 스타벅스 커피 매장이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없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커피, 즉 에스프레소 카페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오래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나라, 그랬던 이탈리아에도 새 바람이 불었다. 밀라노, 피렌체, 로마 등 큰 도시들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것!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인 듯하다.) 아이스 라떼가 그리워 스타벅스를 방문할 때마다 늘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커피를 만들어 댔지만 긴 줄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외국인 관광객이 대다수를 차지하긴 했지만, 이탈리아의 젊은이들도 상당수 스타벅스를 소비하고 있음을, 그들도 아이스커피 음료를 마실 줄 아는(!) 사람들임을 목격하니 대 자본의 힘이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느끼게 된다. 세계화로 좁아진 지구촌은 어느새 먹고 마시고 보고 즐기는 것까지도 동질화되고 있다. 커피는 그 테이블 중심에 놓여있다.
-그 외 여행에서 기록한 커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