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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디 UnD Dec 20. 2023

#5. 사이프러스 나무, 구불진 도로 위의 토스카나

산속 아그리투리스모에서의 시간

여행지 선택을 위해 인스타그램에 올려본 설문투표!

시에나를 떠나 이번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토스카나 평원으로 향한다. 사실 토스카나 렌트카 여행을 계획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사진의 왼쪽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막강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여행을 이곳으로 오게 된 건 다름 아닌 사이프러스 때문이었다. 고흐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나무가 궁금했다. 초록초록한 평원에 기다란 솔 같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규칙적으로 늘어서 고요한 평안함을 자아내는 모습, 이 모습을 꼭 직접 내 두 눈으로 경험하고 싶었다.(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추천보다도 결국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하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습긴 하다.)

날씨는 오늘도 여전히 완벽하고, 시에나를 떠나는 게 좀 아쉬웠지만, 이동해야 할 거리는 꽤 멀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운전대를 잡아 본다. 조금 달리다 보니, 지금부터는 정말 이탈리아 시골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숙소는 산기슭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가는 루트가 만만치가 않았다. 도로가 제대로 닦여있지 않은 길인 데다가, 꼬불꼬불 구불구불 얼마나 곡면이 심한지 운전자가 멀미가 날 정도였다.

이 예상치 못한 적나라한 길을 달리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사실을 배운다. 비포장도로를 오래 달리면 백미러로 보이는 차 뒤쪽이 먼지로 가득 차 거의 볼 수가 없게 된다는 것, 그런 길에서는 보행자가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달려야 한다는 것, 그런 길을 달리고 나면 까만 차가 황토색으로 덮인다는 것도. 아스팔트 길만 달리는 것이 운전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처음 알게 된 당연한 것들. 막 인수받아 반짝거리던 렌트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헌 차가 됐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이상 차가 더 이상 깨끗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기로!


끝없이 달리고 달린다

한참 함께 달리던 차들도 각자의 길로 무심히 헤어지고, 길 위에서 인적이라고는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가는 길은 추수를 막 마쳐 뒤집어놓은 밭들, 올리브 나무들, 멀리 보이는 이쑤시개 같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보인다. 구글맵이 샛길들을 소개해줄 때가 있는데, 재미있게도 이 길은 확실하게 자신 있게 맞는 길 같아 보이는데 막상 가보면 돌아 나와야 하는 경우가 있고, 이 길은 절대 아닐 것 같이 생긴 그 길이 맞는 길임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점차 이 여행길에 약간만큼의 여지를 두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삶의 여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 겉으로 보이는 매끈함이 전부가 아닐 수도, 옳다고 믿은 길이 내 길이 아닐지도. 기왕이면 많이 헤매고, 서고 싶은 곳에 서서 사진도 실컷 찍고, 햇살도 느끼다가 다시 달리고, 서고 달리고를 몇 번 반복하면서 ‘이게 맞는 건가? 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할 때쯤 숙소에 도착한다.


숙소 주차장 쪽 전경

이 숙소는 내가 제일 기대를 많이 한 ’아그리뚜리스모‘라는 숙박 형태인데 팜스테이와 비슷한 개념이다. 농업, 목축업 등을 운영하는 주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서 직접 숙박, 아침식사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다면, 아그리뚜리스모로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나라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퀄리티를 갖춰야 하고, 각종 준수 사항에 부합해야만 한다고 한다. 내가 갔던 지역에만 해도 꽤 많은 숫자의 아그리뚜리스모가 있었는데, 그중 내 여행 동선이랑 맞고 후기가 괜찮은 곳으로 나름 선별을 했던 거다.

사진처럼 독채 형태인 방도, 2층에 있는 방들도 있다. 숙소 내부도 깔끔!

체크인부터 집주인 아주머니의 따스하고 소박한 성품이 그대로 느껴졌다. 여기 와서 호스트들과는 왓츠앱으로 소통을 많이 하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가져다줄 테니 왓츠앱으로 말하라고 했다.(야밤에 방에 붕붕거리는 노린재가 침입했을 때 이 왓츠앱으로 아주머니께 SOS도 쳤다. 벌레가 두렵지 않다는 그녀의 장군 같은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머물렀지만, 여러 에피소드가 생겨 아주머니와 정이 아주 듬뿍 들어버렸다. 아마도 10년 후에 다시 이 시간을 떠올려 본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도에서 이름도 찾아 부르기 힘든 이 지역, 이 아그리투리스모에서의 일일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그녀의 동물농장 투어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공식적으로 숙박에 포함되어 있는 프로그램 같지는 않다.) 동물들을 키우고 있다는 그녀의 언급에, 체크인 후에 잠깐 구경해 봐도 되나요? 했는데... 이게 웬걸. 프라이빗 투어를 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동물들이 많았다. 새장에는 닭만 사는 게 아니라, 토끼에, 공작새에, 오리, 이름 모를 새 등 각종 동물이 지내고 있었다. 나는 심각하게 그들 사이의 평화를 걱정했지만 아주머니 말로는 가끔 투닥거리는 것 말고 심각한 싸움은 없으니 걱정 말란다. 그리고 동물들은 가끔 싸운단다.(하긴 사람이라고 안 그렇겠냐며..) 내가 '그럼 달걀 사 먹을 일은 없겠네요'라고 지나가는 말로 놀라움을 표현하자, 바로 달걀이 있는지 보자시더니 순식간에 6개를 꺼내 나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어느새 내 손에는 아직 체온이 따끈따끈하게 묻은 달걀이 든 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닭장을 지나 당나귀들이 있는 우리에 갔을 때 당나귀들은 반가워서 다가왔고, 크게 울었다. 아주머니는 당나귀들이 착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고 했다. 몇 년 정도 되었냐고 했더니 어려 보여도 20년 가까이 된 녀석들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동물들이 착하고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사실 가슴 깊이 와닿지는 않았는데, 아주머니의 손길에 유순한 모습을 보이는 녀석들을 보니 아주머니가 빈말을 한 것은 아니겠구나 수긍하게 됐다.

아주머니 피셜 사람을 좋아한다는 닭들과 각종 동물, 당나귀까지!

마지막 코스는 소 우리였다. 이곳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여럿 나와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소에게 건초를 골고루 뿌려주고 소가 뛰어놀 수 있는 땅을 고르게 하는 트랙터가 있었는데, 그 트랙터는 그녀의 15살 난(!) 아들이 운전하고 있었다. 나는 15살이 운전을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약간 의문이 들었으나, 그녀는 아들이 트랙터 운전을 잘 배워 숙련되어 있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더 놀랐다. 이탈리아인은 참으로 유연한 사람들이로구나,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우리에 있는 소들은 어린 암소들이고, 우리 건너편에 방사장에는 수소들이 열 마리 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약간 의아한 것은 소들이 왜 이렇게 가만히 서있지 않고 거칠게 뛰어다니고 땅을 파대고, 단체로 난리부르스를 떠는가 했던 건데, 조금 더 지켜보니 그 소들은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적인 시골의 정서에서는 소들이 한자리에 서서 망울망울한 눈으로 먼산을 바라보는 정적인 분위기가 전부인데, 여기 소들은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심지어는 나보다도!  이 모든 것이 일상이라는 듯, 동물들을 돌보고 관리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아주머니가 점점 더 마법사 같아 보였다.

키우는 소가 총합 50마리 정도 된다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부자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속 아그리뚜리스모에는 일몰의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달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정성껏 투어가이드를 해준 아주머니와 걸어오면서 저 달 좀 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주머니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매일 보는 것이라 자기는 감흥이 없다고 했다. 그 무심한 모습마저 나는 멋있다고 두 번째 호들갑을 떨었지만 말이다. 투어 내내 나는 끊임없이 궁금한 질문들을 아주머니께 쏟아냈다. 대부분, 소를 키우면 몇 살 때 이별하게 되는지, 동물을 키워서 혹시 잡아먹기도 하는지 등 사소하고 바보 같은 질문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나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러 이곳에 왔다고 이야기를 하게 됐다. 아주머니에게 사이프러스 나무는 너무나 흔한 가로수와 같은 느낌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뜻밖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사이프러스는 땅을 지탱해 주는 힘이 아주 큰 나무여서 미관상의 이유보다 땅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용도로 많이들 심는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자라지 않는 나무여서, 작고 어린 나무일 때 심어 세월이 한참 지나야 사진처럼 보기 좋은 나무로 성장한다고. 그리고 아주머니는 혼자 렌터카 여행을 하는 내가 대단하고 신기하다고 했다. 자신은 새벽부터 포도밭을 일구고(놀랍게도 이 외에도 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저녁까지 동물들을 돌보느라 여행조차도 거의 다녀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아주머니가 더 대단하고 신기하다. 이렇듯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며, 다른 관점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나에게는 굉장한 호기심과 흥미다. 아주머니가 일이 많아 바쁘셔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멈추지 않고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날 저녁의 달과 일몰

저녁에는 숙소 내 주방에서 요리를 해 먹으며 깜깜해지는 창문을 바라봤다. 낮에 있었던 일을 쭉 되돌아보는데, 아주머니께서 달걀을 쥐어주셨을 때 손에서 느낀 그 달걀의 온도가 여전히 따끈따끈하게 내 심장을 데우는 것 같았다. 처음 본 낯선 이에게도 자신의 삶의 일부를 공유하고, 다정한 사랑을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나는 세상 어디에서건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날 밤, 나는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점을 찍은 기분이 들었다.


선물 받은 달걀을 후라이로! 이 세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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