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할 것 없는 시간을 통해 발견한 시에나의 매력
원래 의도대로라면 이전 편에서 시에나에 대한 찬사를 퍼붓고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피렌체에서 겪은 이야기를 쓰다 보니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 계획된 목차대로 한 도시에 대해서 한 편씩만 쓰려던 내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시에나라는 도시는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간이기에 사족을 부려보기로 한다.
피렌체가 짙은 노란빛의 건물들이 빛나는 반짝반짝한 도시였다면, 시에나는 좀 더 톤다운된 베이지와 옅은 브라운 톤의 풍광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원전 700-900년부터 도시가 형성된 지역이라고 하는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ztl이 둘러쳐져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 그러다 보니 어제 내가 직관적으로 느꼈던 바와 같이 이 도시에 들어섰을 때 아주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다. 누가 그랬던 것도 같다. 한국인은 오래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기고 새로운 것으로 치환하려는 미학관을 가지고 있다면, 이탈리아인은 오래되었지만 아름다운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민족이라고. 아마 앞으로 내가 토스카나 여정에서 만나게 될 많은 작은 도시들이 이러한 자부심으로 우뚝 서 있는 땅들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상점들이나 레스토랑은 종종 2시 30분 전후로 브레이크 타임을 갖고 6시 정도에 다시 오픈을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른 아침시간에는 부지런히 활동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적이 드문 아주 작은 마을이 아니고서야 영업을 하는 가게들이 오전 7시, 늦어도 8시쯤이면 문을 열어놓고 있다. 나는 유유자적한 여행자가 되어 아침이 깨어나는 모습을 관찰하며 감회가 매일매일 새롭다. 대도시인 밀라노, 피렌체와는 또 다른 묘한 여유로움과 한적함이 느껴지는 이 작은 마을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이 시작이었다. 그 결정적 영상은 구독자 수가 꽤 많은 유튜브 채널의 외국 소도시 드라이브 여행 콘텐츠 중 하나였는데, 그냥 그 여유로움과 평온함, 그리고 뻔한 유럽여행의 모습이 아닌 식도락에 대한 소개가 마음속에 콕 박혔다. 다른 사람의 how-to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시에나에서는 완벽하게 동일한 코스를 밟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Consorzio agrario siena". 우리말로 옮기면 시에나 농협 협동조합 정도 될 것 같다. 시에나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육류, 또 제조된 가공식품, 향신료 및 음료 등을 총집합해 놓은 상점이다.
입구부터 S자 형태의 동선을 따라 갖가지 물건을 진열해 두었는데, 시에나에서 생산한 올리브 오일, 발사믹 식초, 토스카나의 밀로 만든 파스타 면, 각종 소스, 건조된 주전부리 등 한 섹션에서 거의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제품들이 시선을 끌어댄다. 아직 기념 선물을 사기엔 이른 여행 초반이었지만, 트러플 오일이며, 15년 된 발사믹이며, 예쁜 병에 든 무화과 잼이며,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가 점점 무거워져 간다. 눈 깜짝할 새 10만 원 넘게 식료품을 사버렸으니, 앞으로 남은 여행 기간 동안에는 숙소에서 열심히 요리를 해 먹어야 할 것 같다. 걱정보다는 이런저런 것들을 맛볼 생각에 기대가 앞선다.
왜인지 계속해서 다른 듯 비슷한 메뉴로 식사하는 듯 하지만,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토스카나 지방은 육류 그중에서도 풍미가 짙은 가공햄류와 치즈로 아주 유명한 곳이라는 점. 오늘도 나는 정육 코너에서 프로슈토 햄과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말이 거의 안 통할 줄 알고 번역기를 돌렸는데, 알고 보니 영어를 매우 잘하시는 정육점 아저씨. 내가 가장 고급의 프로슈토를 먹고 싶다고, 적당한 것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망설임 없이 척척 고기 써는 기계에 사진 뒤쪽에 보이는 진열된 프로슈토를 썰어준다. 어울리는 치즈도 함께. 알아서 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를 믿어도 된다며 은근히 오랜 경력을 자랑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아저씨가 이탈리안답게 느껴졌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연륜에서 오는 여유.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고 띄워드렸더니 무심한 듯도 하지만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역시 젊은 외모로 보인다는 말은 만국 공통 칭찬이다!)
무거운 장바구니와 전문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시에나의 성벽 요새 쪽으로 향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단체 관광객들이 시에나 도시로 들어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차로 이동해 숙소와 중심부만 오갈 땐 몰랐는데, 당일치기로 시에나 여행을 잠깐 들렀다 가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단체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도 10년 전 투어를 신청해서 다닐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땐 좋은 곳에 가면 항상 너무도 금방 닥치는 집합 시간을 의식하면서, '아, 나도 언젠가는 여기를 자유여행으로 와서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여러모로 지금이 시간이 꿈을 이룬 여행임을 깨닫는다. 시에나 중심부를 벗어나 살짝 언덕길을 오르면 절벽과 같은 경계를 감싸고 카페 하나가 있고, 시에나가 3인칭으로 멀리 보인다. 전체적으로 굽어보면 이 도시의 모습과 이 도시에 새겨진 기억들, 문화들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곱게 나이 든 얼굴의 주름처럼, 또 지난 세월이 새겨진 피부톤을 가진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어딘지 모르는 곳까지 펼쳐진 평원과 나무들, 그리고 자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원거리 풍경을 하나하나 눈으로 쓰다듬으며 성벽 산책 코스를 쭉 따라 돌다 보니 조용한 나무 그늘과 앉을만한 벤치들이 있었다. 아직은 조금 뜨거운 듯한 한낮의 햇빛을 피해 그늘에 앉아, 샌드위치를 꺼내 먹는다. 배고픔을 달래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먹을 것 하나, 마실 것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시간이 천천히 느려지다가 멈춘 것 같았고, 귀에는 나무 위 새소리만 들려왔다. 이곳으로 나를 부른 것은 누구일까? 나 자신일지, 우연이나 운명 같은 다른 이름이 붙여진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과 공간의 틈에 끼어있다가 성벽을 내려왔다.
갖가지 여유를 부려보아도 매일 성실하게 태양은 일한다. 어느덧 시에나에 다시 저녁이 찾아오는 기운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퇴근하는 여유빛이 돌고, 건물 빛에는 진지한 밤의 기운이 얹힌다. 대부분의 여행지에서는 햇빛부터 모든 풍경에서 밝은 톤의 색감과 기운을 좋아하는 편인데, 시에나는 조금은 다크 한 무드가 잘 어울리는 곳이라서 생소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 조금은 마음을 풀어두어도 된다는 느낌, 아무도 모르게 혼자 걸어도 될 것 같은 느낌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조금 어설프고 연약한 부분은 아무래도 묵직하게 덮어줄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특별히 맛집을 서칭 해보지도 않았고, 숙소에서 소개받은 곳들은 너무 격식 차려서 먹어야 할 것 같은 레스토랑들이어서 발길 닿는 대로 식사 장소를 정하기로 했다. 내가 주로 확인하는 지표는 가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다. 맛있는 음식은, 갑자기 다가온 사랑처럼 숨길 수 없는 것이라고 믿으니까. 분명히 얼굴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선택된 이곳!
원래 식당이 아니고 주류 음료를 파는 바 같은 곳인데, 애피타이저 혹은 안주 같은 느낌으로 미리 만들어진 요리를 골라서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된 곳이었다. 계속 빵, 치즈만 먹은 것 같은 기분이라 약간은 신선한 식품을 먹고 싶어 메뉴를 몇 개 골랐다. 적당한 가격에 과일도 신선, 음식 맛도 괜찮은 (내 기준에서는) 맛집을 발견했다. 밤거리의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마감 시간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고 와인이나 칵테일을 즐기고 있었다. 나 또한 야외석에서 시에나를 마음껏 호흡했다. 꿈속 같은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그리고 언젠간 또 돌아오리라.라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너무 귀여운 장면이 벌어졌다가 지나가버렸다. 얼마나 갑자기 일어난 일인지 사진도차 못 찍었다.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길고 검은 닥스훈트류 강아지가 뚱땅뚱땅 핸드폰을 물고 걸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잉?' 했는데 뒤이어 웃음기 가득한 주인이 지나간다. 나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라는 표정으로 주인을 쳐다봤지만 주인은 그저 웃고 있을 뿐. 옆 테이블에 앉은 아저씨 아줌마도 보고 그 상황에 실소가 터져 나와 함께 하하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직도 어째서 그런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내가 뭔갈 잘못 본게 아닌지 하는 의문만 남아 있다.
시에나의 밤공기에 취해 중심부를 한 바퀴 돌고 귀가하기로 결심했다. 9월 말이었지만 날씨는 이상하리만치 포근했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니 밤새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항상 안전에 조심!)
시에나는 중심부 마을을 도는 데에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정도로 작은 도시라는 것을 발로 밟으며 더욱 체감할 수 있었다. 시에나의 거리는 중세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풍스러웠고, 내가 모르는 어떤 먼 세계의 옛 거리가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느낌에 자주자주 나는 꿈속을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 괴이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지금껏 내 현실은 진짜 나의 현실은 아니었으니까. 성공적으로 탈출했다는 느낌이 좋았다.
이곳에 와서 한 것이 아주 특별하게 누군가에게 추천할 만한 것이랄 건 없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시에나에 와본 누군가가 이 도시에 대해 전혀 다르게 느낀다고 해도 존중할 수 있다. 세상의 수많은 현상들 중 어떤 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설명하고 합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많이 있다. 시에나에 대한 나의 선호와 끌림은 후자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유를 댈 순 없지만, 처음부터 좋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토스카나 여행의 첫 목적지로서, 또 대표지로서 나는 이 여정에 대해 이해하는 첫 단추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 그 모든 것들이 그 이후에 내가 경험하게 될 모든 것의 실마리가 되었고, 여행이란 내 일상을 떠나 누군가의 일상에 잠깐 발 담그는 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