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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디 UnD Dec 18. 2023

#4. 톤다운된 아름다움, 시에나

피렌체에서 시작된 토스카나 여정의 첫 마을

피렌체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 오후부터는 렌트카를 타고 토스카나 지역의 작은 소도시들(행정 구역의 크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꼬무네(Comune)라고 부른다)을 거치며 포도원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가득한 평원을 누빌 계획이다. 유럽에서 차 렌트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아침 식사 겸 간단히 요기를 위해 피렌체 시장에서 멧돼지구이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어보기로 했다. 어제는 배가 불러 차마 먹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비주얼에 꼭 한번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브에 절인 선드라이 토마토를 서비스로 넣어주신 멧돼지 샌드위치, 10유로

맛을 평가하자면 허브 같은 향신료를 겉면에 묻혀 구웠다는 점에서 고기의 향이 한국의 족발과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족발 만큼 콜라겐이 많아 쫄깃하거나 하진 않았고 수분기 없이 아주 담백한 맛이었다. (닭에 비유하면 닭다리 살 보다는 닭가슴살에 가까운 식감이다.) 지극히 한국인 입맛인데다가 촉촉한 맛을 선호하는 나는 소스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빵에 고기를 끼워주는게 기본 메뉴인 듯 했다. 오일의 촉촉함과 토마토의 상큼한 맛을 더하고 싶어 샌드위치가 완성되어가려는 찰나에 드라이 토마토도 넣어달라고 아주머니께 다급하게 부탁했다. 빵의 팍팍한 이 맛도 유럽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 이 심플한 레시피도 이탈리아스러운 것이다 생각하며 부지런히 냠냠 맛있게도 먹었다. 사진에 보이는 빵 사이를 갈라 고기를 넣어줬는데, 한개가 생각보다 커서 반만 먹고 반은 싸달라고 부탁했다. 이곳에서는 먹다 남은 음식을 포장해가는 것을 요청해도 모두들 자연스럽게 패키지를 제공해주어서 부담없고 편했다. 혼자 여행하면서는 음식 주문이나 양 조절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테이크아웃만 되면 사실 다음 끼니에 먹어도 되고 끼니 사이 배고플 때 요깃거리로도 좋다. (돈도 덜 든다는 점도 장점이다.) 종이로 한번 더 꼼꼼히 포장해준 아주머니의 손길에 소소한 감동을 느끼며 다시 길로 나선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피렌체에서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저렇게 검색해보던 중, 이곳 피렌체에 다비드 상 오리지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유명한 작품을 소장중인 미술관들도 많지만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대부분 관람이 어려웠다. 애초에 미술관, 박물관 관람 스타일의 여행자는 아닌지라 큰 미련은 없었지만, 다비드상 정도는 조금 구미가 당겨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피렌체의 아침 거리 풍경

역시 가장 기분 좋은건 남들이 일할 때, 내가 쉬는 것이던가. 타인 대비 상대적 행복에서 만족감을 느끼는건 저급한 일일지 모르지만 바쁜 거리의 풍경 속에 급하지 않은 나를 발견하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술관에 가까이 다가올 수록 무리 진 사람들이 느껴졌고, 나처럼 전혀 급할게 없지만, 예술 작품을 보기 위해서라면 부지런히 오픈런을 위한 줄을 얼마든지 설 수 있는 동지 관광객들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사 철골 구조 뒤의 기다림은 만만치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은 아무 노력없이도 자연히 흐른다. 30분 정도 기다렸을 때 다비드 상을 보러 입장할 수 있었는데 아카데미 미술관은 다비드 상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 공간이 모두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다윗의 위엄있는 자태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술작품을 본 내 감상은 '잔잔한 경이로움'이다. 일단 다비드상은 크기가 생각보다 정말 컸다. 박제된, 모조의 크기와 형태의 이미지들을 수없이 소비해왔기 때문인지 그 크기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실제로 이 석상의 높이는 4m가 넘는단다. 카메라로도 비율을 살려서 한번에 잘 담기가 쉽지 않았다. 다윗의 팔, 등에 있는 근육이며, 혈관 등에 대한 섬세한 표현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조각에 담기는 것이 형태만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인격과 영혼이라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어왔다. 한 조각 작품을 통해 인물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손등과 팔목의 혈관과 힘준 발가락까지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쉽사리 다비드상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넋놓고 바라봤다.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고, 크기와 디테일만큼이나 흠뻑 취해 맛볼 구석이 많은 잘 깎아 다듬어진 대리석이었다. 거의 1시간에 가깝게 한참 동안의 시간을 다윗의 매력에 빠져있다가 번쩍 정신을 차린 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점점 이 피렌체에 이별을 건넬 시간이 다가왔다. 그간 에어비앤비 호스트 아주머니랑도 친해졌는데, 아주머니는 날 만나자마자 BTS를 아냐고, 자기가 BTS 팬이라고 친근함을 표했었다. (나는 한국인의 자격이 없을 정도로 이런것에 무관심한 편이다. 지인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늘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는 한국인이 BTS를 공부해야한다는 것.)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해놓은 숙소이지만 한번 컵라면 끓일 물도 주전자에 끓여주시고, 나는 감사의 인사로 챙겨온 마스크팩을 전달해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다. 마지막으로 차를 빌려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고, 잘 지내시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신다.

"시에나로 갈거에요."

"시에나? 거기 가는 길이 완전 험한데, 괜찮겠어?"

"아, 뭐 네비도 있고 천천히 가야죠."

"거기 가는 길은 이탈리아 사람들도 운전 잘 안하는 코스야. 암튼 조심히 잘해."


이렇게 친척 아주머니처럼 다음 행선지와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서 걱정도 해주셨다. 물론 이것이 나를 더욱 긴장되게 했다는 것은 안 비밀이었다. 애써 씩씩한척 아무일 없을거라고 걱정마시라고 했다! 이렇게 인사를 건네고 무사히 갈 줄 알았는데, 이번 여행에는 정말 엉뚱하고 어이없는 실수들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렌트카에 휴대폰 거치대가 없을 듯해서 다이소에서 싸게 실리콘 거치대를 사왔는데, 글쎄 바닥 부분에 접착면이 없고 말그대로 평평한 곳에 "거치"만 해두는 용도였다는 것을 출발 30분전 알게 된 것.

??? 아뿔싸

차 계기판 위쪽이 평평할리는 만무하고, 거기에 고정조차 되지 않으면 폰을 꽂아놓을 수도 없는 상태일텐데, 거치대를 새로 살 곳이 떠오르지도 않고 심장이 떨려오고 땀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해결 방법이 있을거야. 양면 테이프 같은걸 팔려나? 아주머니께 물어보자. 뭔가로 바쁘게 온라인 미팅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양면 테이프 단어가 무엇인지 일단 물어봤다. 혹시 가지고 계신지도.

번역기를 급하게 돌렸지만, 이런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본인은 가지고 있지 않다시면서, 이 단어는 아닌 다른 어떤 단어를 말씀해주셨지만 스펠링을 추측할 수가 없어 즉시 습득은 잘 되지 않았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까르푸 지점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고 하는데 이게 있는지 혹시 이탈리어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 도움을 청했더니, 흔쾌히 해주겠다고 하시는 아주머니! 오, 감사합니다!!

외국인과 이탈리아사람들 사이의 어색하고 어눌한 영어대화 혹은 일방적인 의사 전달 행태와는 다르게 이탈리아 사람끼리는 이탈리아어로 소통이 매우 정확하게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너무나 감사했다. 땀나게 뛰어 갔다와 완성된 나의 임기응변의 결과물 수리 거치대!

살았다, 겨우

아주머니에게 당신은 나의 은인이라며, 거의 울먹거리며 감사인사를 전하자 괜찮다고 웃어보이는 아주머니였다. 한번의 큰 좌절을 극복하고 나자, 이제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추가가 되었다. 문제 해결에 골몰하느라 힘은 쭉 빠졌지만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돌길위 캐리어를 들들거리며 렌트카 대리점으로 향했다.

천천히, 최대한 슬로우슬로우하게 진행되는 이탤리언식 출차 확인 절차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지만, 무사히 나와 함께할 동반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Crossland라는 이름의 까맣고 예쁜 내 차!

차 상태도 괜찮은 것 같고, 크기도 넉넉해서 마음에 안심이 되었다. 직원은 한사코 거절하는 나에게 나가는 입구가 어려우니 자기가 차를 빼주겠다고 말했다. 나름 운전 경력이 좀 되는 나는 그런 자존심 상하는 일은 허락할 수 없으므로 걱정말라고 했다. 그리고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왜 굳이 빼준다고 하지? 라며 성차별에 대한 약간의 의심을 가지기도 했다. 코너를 돌자마자 차가 빠져 나가는 경사로의 경사가 대략 45도 정도 된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 의심은 사라졌다. 친절한 직원이었군.

길을 나오자마자 나의 운전 경력은 무색해지고, 트램이 지나가는 라인과 다른 차선들이 전혀 구분되지 않은 나의 차는 이리저리 방향을 잃은 채 우유부단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머, 이러다 사고나겠는데?'

다행히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반 차도에 진입했다. 거치대가 부착 불가능한 형태였을때보다는 훨씬 더 즉각적인 두려움과 긴장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또 왜이렇게 많이 다니는건지. 피렌체 시내 안에서는 굉장히 도로가 복잡해서 계속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점차 외곽으로 빠지면서 눈앞의 풍경은 달라졌다.

하늘은 파랗고, 여긴 어딜까? 일단 무사히 도착하자

시에나와 같은 소도시를 들어가면서부터 이탈리아 운전에서 가장 조심해야될 것이 'ZTL' 이라는 구역이다. 이 ZTL을 일반적인 차들은 통행할 수 없고, 통행하게 되는 경우 강력한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 이탈리아에는 중세 혹은 그 이전부터 만들어진 오래된 도시들이 많다보니, 도시의 훼손을 막고 오래 유지하기위해서 나름 이런 보호 구역을 설정해놓은 것으로 생각이 된다. ZTL은 구글 맵에도 정확히 그 범위가 표시되지 않고, 내비게이션 안내를 받아도 확인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 무심코 지나가게 되어 있는 경로가 상당히 많아서 악명이 높다. 여행 전 걱정이 되어 구글링을 하다가 우연히 누군가 한땀한땀 만들어놓은 ztl 지도를 플러그인처럼 구글 맵 위에 얹어서 온 정도가 유일한 대비책일 정도였다. 이것조차 정확히 작동할지 알 수가 없는 상태로 출발을 한 것이다. 이럴때는 상당히 J형인 나는 숙소에도 미리 혹시 숙소 가는 길에 ztl을 지나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문의하고 몇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해본 상태긴 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로 부릉부릉 달려 시에나 지역에 들어선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 나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숙소로 오는 길 하나하나 골목의 모습까지 내가 아는 이탈리아, 그러나 내가 아직 사랑할 기회가 없었던 이탈리아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빨리 차에서 내려 이 곳을 두 발로 밟고 싶어졌다.

꽤나 고풍스러운 컨셉의 숙소 치우사렐리

도착한 숙소는 외관과 내부 모두 훌륭했고,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었지만, 숙소 직원이 친히 내 무거운 캐리어를 2층까지 올려다 주는 것으로 안도+대만족했다. 짐을 내려놓고 나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위기대처하랴, ztl 피하랴, 낯선 길을 운전하랴 긴장이 꽤 높았는지 갑자기 좀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늦오후의 빛의 표면

참 이상하게도 여행의 오후, 저녁 시간대는 평소보다 더 세차게 흐르는 것 같다. 해가 지기전 최대한 움직인다는 것을 철칙 삼아 동네 구경을 나왔다. 해는 점점 기웃기웃 넘어갈 듯 눈치를 보고 있고, 빛은 아름답게 모든 것 위에 투영되었다.

시에나의 첫 인상, 우체국 앞 광장

이제 막 도착한 도시 시에나에 어딘가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시계에 남은 모래가 얼마 없는 걸 바라보는 그 순간처럼 나는 애타게 시에나의 저녁 햇살을 붙잡고 싶었다.


[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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