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졌지만 낯설지 않은
피렌체에 좋은 기억이 있었다. 버글버글하고 사건 사고가 많을 것 같은 로마와는 다르게 거리의 분위기도, 길의 모습도, 다리까지도 고풍스럽고 예뻤던 도시, 젤라또가 찐으로 맛있었던 도시로 내 감각 속에 저장되어 있던 피렌체.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는 기치 아래에 한 번 갔던 여행지는 되도록이면 가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지만 이탈리아만큼은 예외였고, 또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피렌체는 이번 여행의 핵심인 토스카나 렌트카 여행을 시작할 도시로 제격이었다. 아는 맛이라 또 한번 맛볼 수 있을까 궁금했고, 같은 장소에서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이 기대되기도 했다.
이번 여행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밀라노 첸트랄레 역에서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까지는 1시간 55분, 약 40유로 정도의 티켓값을 지불했다. 놀랍게도 점심 무렵에 출발하는 기차는 거의 만석이었다. 기차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기차에서 내리고 난 후에도 발 디딜틈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였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의 아름다운 아줄레주를 감상할 여유도 잃어버리고, 수많은 인파에 휩쓸려 도망치듯 역을 빠져나왔다. 여름 성수기를 다 지난 시즌에 이건 무슨 일이람? 의아한 생각이 들면서 홀로 캐리어를 끙끙거리며 돌 계단을 내려와 숙소로 향한다. 유일하게 피렌체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했는데,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은 느낌이다. 사람들이 너무 몰리는 것 같아 꾀를 써 버스를 탔는데 도착하고보니 버글거리던 역앞 그 정류장에서 트램을 타는 게 그나마 가장 빠른 이동 코스였다. 허탈하기도 하고 몸이 무거워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숙소 침대에는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시트의 이불이 깔려있었다. (이 얇은 린넨 같은 이불은 그 후로도 이탈리아 여행 내내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정말이지 두꺼운 이불을 덮지 않는 민족들이었던 거다. 저녁에 자기 전 이 위에 덮을 담요를 요청해야 한다! 반드시!!)
하지만 이렇게 누워있자니 역시 빠르게 흘러갈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뭣보다 배가 너무너무 고파졌다. 아침에는 나름대로 배부르게 먹고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벌써 오후 2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배고플만 하네. 구경도 하고 뭐라도 좀 먹으러 나가야겠다’
주황빛에 가까운 짙은 노란색의 건물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이 도시에 다시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하늘은 맑았고 온도는 적당했다. 길을 좀 잃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에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가셨다. 길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알고보니 이 시기가 나름 글로벌 성수기였나보다. 특히 미국인들이 유럽,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여행을 커플, 가족 단위로 많이 오는 시기라는 것! 어쩐지 이탈리아어보다 영어가 많이 들리는 기분이라더니..
허기를 참다참다 해산물파스타가 유명하다는 레스토랑 중 한 곳을 뛰쳐들어갔다. 보통 예약을 미리 하지 않으면 오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인데, 혼자라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혼자라 그런지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진 자리로 안내해주길래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여행와서 내뜻대로 안되는일, 기분나쁜일 한번 없으면 그게 어디 여행이겠는가. 메뉴판을 침착히 둘러보고 첫 끼니이니 풍족하게 배를 채우기로 했다. 내 선택은 카프레제 샐러드와 쉬림프 파스타.
혼자 먹기엔 좀 많은 양이었지만 이 정도 사치는 부려주고 싶었다. 생각보다 평범한 맛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알단테로 덜 익은 듯한 저 면도, 바질 페스토가 얹어진 두꺼운 치즈와 토마토도 다시 먹고싶은 맛이다. 추억이 될 맛.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피렌체 전통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 중 하나가 바로 시장 구경인데, 이탈리아는 미식의 도시이니 그 재료를 파는 시장도 볼 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신선 식품이다보니 사갈 수 없는게 너무 아쉬울 정도로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언젠가 필요할 지도 모르는 기대감으로 파스타 요리에 필요한 향신료 주머니와 처음 보는 이탈리아식 주전부리도 괜히 사본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풍경, 또 생업의 공간일 이곳에서 이렇게 아무 다른 생각 없이 자유롭게 노니고 있으니 괜시리 나혼자 부자가 된 것 같다. 시장을 떠나기 전 친절한 이탈리안 아주머니네 가게에서 납작복숭아 몇개를 사서 또 거리로 나간다.
피렌체 중심가의 면적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라서 20-30분만 걸으면 스팟들에 쉽게 다다를 수가 있었다. 옛 기억을 더듬어 피렌체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유명한 다리인 베키오 다리 근처로 가본다.
아직도 생각나는게 베키오 다리는 베키오 다리위에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반대편 트리니티 다리에서 봐야한다고 약 10년전 피렌체를 방문했을때 투어가이드에게 전해들었던 내용이다. 그 끝에는 아주 맛있는 젤라또 집도 있다고.
다시 방문한 젤라또집 양에 대한 인심은 살짝 줄어든거 같지만, 그 맛은 여전히 훌륭했다. 그래, 역시 이탈리아는 젤라또지. 북적이는 관광객들 사이에 섞어 마음껏 젤라또를 먹는 나의 행동이 새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구글 지도를 검색하지 않고도 발길 닿는대로 이곳 저곳 골목을 탐험해본다. 걷고 싶을때 걷고 앉고 싶을때 앉아 쉬고, 먹고싶은 걸 먹는 이 단순한 즐거움. 여행이 주는 큰 기쁨의 영역이다. 유럽 여행을 할 땐 늘 구름이 따라다니던 불운의 나에게 이번 여행에는 햇빛의 축복이 잔뜩 차고 넘치게 주어졌다. 흐린 날에 여행을 할 때 늘 햇빛 찬란한 장면을 상상하며 걸었었는데, 그리고 다시 또 그곳을 만나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간절히 바랐었는데 어쩌다보니 그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보다 더 행복한 기분이 있을까.
이전에 피렌체 여행을 할 때를 떠올려보면 여전히 지금도 그 때 유명했던 것, 또 한국 사람들이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관성적으로 찾아가는 내가 우습기도 하지만, 또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 하며 모든 순간을 허용할 수 있게 된 나 자신도 발견하게 된다. 또 관광객이 너무 많아진 피렌체를 보며 약간은 서글프고 아쉬운 마음도 든다. 이 피렌체의 따듯한 색감의 매력, 누구든 자유로이 걷게 하고, 이 멋진 도시를 들여다보라고 인도해주는 분위기에 흠뻑 반했었는데, 묘한 심정이 되는 걸 보니 나는 마치 원래부터 영원히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 도시 풍경을 독점하고 싶었었나보다. 카메라 렌즈를 들어올리면 풍경보다 사람이 더 많이 보이는 도시 피렌체라는 사실,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현재진행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겠다.
혼자 여행을 한지 3일 째, 피렌체의 식도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티본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정말, 약 15년 전부터 가입되어 있는 '유랑' 카페를 열었다. 티본 스테이크는 절대로 혼자 먹을 수 없는 양과 가격이기 때문에 큰 맘 먹고 식사를 위한 동행을 구해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인과의 벙개 모임이라니, 나 스스로도 웃음이 났지만 꼭 먹고 가고 싶은 마음 하나로 용기를 냈다. 다행히 내가 올린 글에 댓글이 달리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을 만나려니 쭈뼛쭈뼛 민망할 것도 같았지만 여행 중인 조국 동포를 만나 같은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한국말로 신나게 수다를 떠니 속이 후련했다. 맛있는 스테이크는 덤!
실컷 떠들다가, 또 서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듣다가, 꽤 깊은 밤이 되었다. 밤이 되었지만, 밤이 된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따스했다. 배도 꺼뜨릴겸 걸어가는 집에 가는 길을 거리의 아티스트들, 그리고 피렌체의 회전목마가 밝혀주었다. 혼자이지만 혼자인 것만은 아닌, 외롭지 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