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초반부터 여권을 잃어버리다
내가 이틀을 묵은 건 차이나타운 한 구석에 위치한 밀라노 숙소. 혼자 여행 중인데다가, 우리나라로 치면 차이나타운은 왠지모르게 무섭고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장소인지라, 체크인 때 직원에게 물어봤다.
"여기 안전한 지역인가요?"
직원은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여긴 안전한 동네여서 밤 늦게까지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행자의 심정이라고는 모르는 현지인의 대충스러운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도착한 다음날, 몹시 피곤했던 지난 밤을 뒤로하고 눈은 예상보다 일찍 떠졌다. 가볍게 지리도 익힐 겸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약간 쌀쌀하지만 아주 춥지만은 않은 온도가 꽤 맘에 들었다. 후드 집업을 하나 걸치고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골목골목을 응시했다. 길거리는 지난 밤의 캄캄함을 몰아내고 조용히 밝아져 있었다. 숙소 주변은 가게 간판들과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비어 있는 테라스 테이블들이 연이어 서 있는 나름 번화가인 골목인 듯 했다. 만두가 그려진 가게를 만났다. 가게 셔터는 반쯤 올려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만두를 빚는 아낙네들이 보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무심한듯, 크게 마음쓰지 않는 듯한 손길로 만두를 이미 많이도 쌓아두었다. 그렇게 목적없이 구경하며 걷다보니 살짝 배가 고파지는 듯 했다. 눈에 들어온 건 가장 근거리에 있는 동네 빵집! 지갑도 들고 나오지 않은 나는 아까 점찍어둔 그 곳에가서 "이탈리아스러운" 메뉴를 먹으리라 다짐하며 다시 숙소를 들렀다. 한걸음에 달려간 그 빵집은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의 방앗간이었다. 그곳 입구에 앉아 들어오는 사람들(그리고 동행한 아기와 개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히 몇시간은 즐거울 수 있었을 터이다.
밀라노에서의 첫 끼 치아바타 샌드위치, 무화과 타르트와 동네 베이커리의 풍경
아무 것도 쫓길 것도 없는 나는 천천히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전혀 다른 시간대에 속한 이 나라에 차츰 적응해간다. 삶이 활동하는 시간대가 바뀐다는 것은, 시간이 제약하는 모든 틀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나에게 출근을 강요하지도, 무엇을 언제 먹고 마실지를 규정짓지 않는다. 그저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원할 때 하면 된다는 것. 많은 비용을 들더라도 감수할만한 여행이 주는 고유한 자유함이다. 다음 일정도, 계획도 없는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늘의 유일한 미션을 현지 USIM 사기로 정하고 자리를 떴다.
어젯밤 그리도 오지 않아 나를 애태우던 트램은 밀라노의 주요한 대중교통수단 중 하나였다. 트램, 버스,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일단 눈에 보이는 지상에, 꽤나 잦은 빈도로 도착하고,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트램이 타기 만만하게 느껴졌다.(캐리어를 들고 올라야하는 높디 높은 구식 계단을 제외하면 꽤 운치있고 괜찮은게 사실이다.) TIM이라는 현지 1위라는 통신사 회사 대리점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처리하고도 그 속도까지 빠른 한국과는 조금 다르게, 대리점에 방문한 사람이 많아서 뜻밖이었다. 약간 기다리긴 했지만 외국인을 전용으로 비교적 가성비 좋게 나온 USIM이 있어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종업원이랑 이런저런 수다도 떨면서 필요한 서류 작업을 하는데, 내국인은 해당 유심을 사용할 수 없는지 여권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별 생각 없이 여권을 건네주고, 유심과 앞으로 내가 사용하게 될 전화 번호를 건네받았다. 유심 사기 미션은 완료되었고,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곳 저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세계적인 걸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전시하는 성당도 있다기에 기웃거려보았지만 미리 한두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조차 불가능한 곳이었다. 어이없는 허탕도 쳐가며 충분히 걸을만큼 걷고, 에스프레소도 한잔 땡기고 기분좋게 숙소로 들어왔는데 그제서야 가방 한구석이 허전한 걸 느꼈다. 여권이 없어졌다!
이럴수가,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트램도 여러번 타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도 갔었는데 혹시 어디다 떨어뜨린걸까? 누가 가져간 걸까? 그때부터 오만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방 속 여권이 손에 닿은 마지막 시점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여행 초반부터 여권 분실이라니. 여행 하면서 다양한 일을 겪곤 하지만 여권 분실은 처음이어서 손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참 좋은 나라인 것은 이런 당황스러운 순간 영사관 센터와 카카오톡으로 1:1 채팅을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한국과의 시차 같은건 아무래도 생각하지 못한채 채팅을 신청했다. 상황을 설명하니, 이탈리아 주재 영사관 연락처를 알려줄테니 직접 문자나 전화를 해보란다. 다행히 유심을 받아놓은 것이 있어 문자를 보낼 수 있었는데,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 영사관님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친절히 이 대책없는 동포를 응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정말 미안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선은 영사관님께 '마지막으로 여권 꺼낸 곳이 유심을 구입한 대리점이라 그리로 향하고 있지만, 아직 영업중일지 찾을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난처함을 털어놓자, 그녀는 언제까지 밀라노에 머무는지, 언제 출국인지, 다음 이동은 언제 어떻게 하는지 등의 정보를 물어보더니, 명백히 업무 시간 외임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내 기차 탑승 전 임시 여권을 발급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미안함을 느끼면서, 여권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만약 불가피한 경우에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찜찜한 메시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아, 구질구질하고 민폐스럽구나! 내가 여행의 자유를 누리면서 바보같은 실수로 누군가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은 정말, 그 기분은 자괴감 그 자체였다. 가뜩 심란한데, 유심을 구입한 대리점으로 향하는 길에 기상이변까지 일어나 몇분전까지 쨍쨍하던 마른 하늘에 갑자기 우박까지 보란듯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붐비는 트램 안 사람들은 다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들썩였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다들 "뭔일이래?" 하는 표정이었다. 트램에서 내리는 순간에도 우박같은 비 같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는 그쳐지지 않았다. 만일을 대비해 넣어둔 작은 양우산 겸용 하나를 처마삼아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겨우 도착한 아까 그 대리점. 나를 응대해준 여자 직원은 푹 젖어서 들어선 나를 보고 아무일 없었단 듯이 여권을 들어보이며 담담한 표정을 했다. 아니 ?! 내 유심 번호도 알았을텐데, 왜 여권을 두고간 사람에게 메시지나 전화 한통화 하지 않았을까? 어이가 없고 억울하면서도 안도감에 웃음이 나왔다.
"오 마이갓! 저 거의 죽을 뻔 했어요."
"두고 갔더라고, 미안해."
이렇게 쿨하다니? 이럴 때는 부아 내는 사람이 지는거다 싶어서 그냥 훌훌 털기로 했다. 드라마틱하게 치달았던 사건도, 날씨도 이상하게 한순간에 풀어져 내렸다. 맑게 개어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여행이 끝날때 까지 절대로 여권은 매 순간 체크한다. 더이상 무언가를 할 의지를 잃은 채로 귀가했다. 긴장이 풀린 건지, 시차 때문인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쓰러지듯 잠이 든 두번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