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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디 UnD Dec 18. 2023

#1. From Seoul to Milan

다이내믹한 이탈리아 여행의 시작

또다시 공항. 차분한 듯 들떠 있는 이 공기가 무척이나 반갑다.

현실의 일들에 치여 여행 전날까지도 온전히 여행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어수선함과 죄책감에 힘들어했건만, 이곳을 들어서는 순간 모든 일상이 일시정지되는 공간에 쏙 하고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온전히 혼자인 여행의 날들이 설레기도 하면서 갑자기 두렵고 떨리기도 한다. 기혼이 된 이후 여행은 늘 함께였고,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누군가에게 계속적으로 의존적인 상태라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긴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다른 평행 우주에서 나를 만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과거의 어느 때 같기도 하고, 미래 같기도 한 지금의 이 감각은 분명히 현실 그 자체였다.


비행기 수속을 하고, 짐을 부치고, 비교적 가벼워진 무게로 입국장에 들어섰다. 그저 앉아있기만 해도 시간은 자연히 흐르고, 모든 행동은 안내 방송에 맞게 움직이면 된다. 너무 큰 자유도, 너무 큰 제약도 아직은 주어지지 않은 이 장소에서 여러 가지 감각을 느낀다. 아직은 땅에 붙어 있다는 안정감과 곧 떠나게 된다는 막막함이 공존한다. 기다려온 듯 떠밀리듯 비행기에 탑승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뒤섞인 채로, 끝없이 지루하게 남은 비행시간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자유를 얻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말펜사 공항 도착이다. 국적기를 함께 타고 온 한국 사람들은 한국인답게 빠른 걸음으로 입국 수속을 밟았지만, 짐을 실어 보내는 컨베이어 벨트는 묵묵부답이다. 무용한 신속함을 목격한 나는 비로소 이탈리아에 온 것을 실감한다.


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치 처음 해외여행을 나온 사람처럼 어리버리 내 눈은 어떤 글자를 읽어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머릿속이 헤롱거린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 기차역 자동발권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키오스크에서 겨우 3일 교통권을 발급했다. 분명히 영어로 적혀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설명이라고는 없는 각각의 선택지를 눌러야 할지 말지 확신이 없었다.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난감하다.


기차 플랫폼에는 같은 시간대에 비행기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한 10분쯤 기다렸을까, 기차 한 대가 바람을 일으키며 들어오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종점인지 다음 역일지 모르는 어떤 이탈리아어 이름이 적혀있었고, 나는 바로 옆에 아까부터 한국말로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 현지인처럼 보이는 한국인에게 슬쩍 물었다.


"이거 중앙역 가는 거 맞나요?"

"네, 맞아요."


자신 있게 대답하며 기차에 탑승하는 그 남자. 의심할 여지없이 나도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겨우 기차에 탔다.

근데 왠지 모르게 같이 탄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느낌이 쌔하게 들었다. 한 역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눈빛에 물음표를 띄었고, 나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내 눈은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아이고, 죄송해요. 이거 중앙역 가는 거 아닌 것 같아요."

"아...."


함께 한참을 지하철 노선을 연구해 봐도 가다가 비슷한 루트로 바꿔서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있는 노선이 아니었다. 무조건 다음 역에 내려야 한다. 이 기차가 오고 난 뒤에 중앙역에 가는 기차가 왔을 거라는 느낌이 왔고, 지금 내리면 공항에서 사람들이 많이 탔더라도 다음 기차는 탈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그 남자의 일행과 나는 아무도 없는 기차역에 덩그러니 내려져 있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중앙역 가는 건 줄 알고.... 잘못 알려드렸네요."

나는 비행 피로와 빨리 숙소로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살짝 힘들었지만, 너무 미안해하는 그분의 얼굴 때문에 차마 비난의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다음 거 타면 될 것 같아요."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는 게 더 낫다. 라는 교훈을 얻고 웃어넘길 수 있었던 나를 되돌아보며 그간 인격적 성장이 있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때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독일 여행을 하면서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막차의 막차를 탄 적이 있었다. 타이밍 맞춰 환승까지 해야 겨우 집에 갈 수 있는 상황에서 불 하나 안 켜진 기차역 플랫폼에 내리게 되었다. 깜깜하고, 춥고, 무서운데, 배까지 고팠던 그때.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려야 물건이 나오는 구식 자판기에서 겨우 버석한 초코바 하나 꺼내 먹고 힘을 내자 다짐했다. '귀소본능'이라는 단어를 몸소 경험했던 그 날의 기억. 그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되던 이 플랫폼의 장면, 그래도 그때보다는 훨씬 낫네. 아직 밤 10시도 안 되었고, 꺼내먹을 사탕도 있었다. 여유롭게 이어폰을 꽂고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이탈리아 대중교통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겨우겨우 도착한 중앙역 근처의 숙소를 가기 위해서 한 번의 트램을 타야 했는데, 구글 맵이 알려주는 애매~한 트램 정류장의 위치는 야밤에 눈이 침침해진 나에게 정말 너무 큰 챌린지였다. 꼭 내가 타야 할 트램은 이미 한텀 지나가고 다음 텀을 기다려야 한다.



왠지 모르게 옆에 앉은 사람까지 낯설고 무섭게 느껴지는 여행 첫날밤의 트램 정류장. 그래도 숙소에서 오늘의 휴식을 만끽하려면 무거운 캐리어도 트램에 올렸다 내렸다 하며, 무릎이 갈리며 끝까지 힘을 내서 가야만 한다. 씩씩한 척 해보지만, 길도, 건물도, 사람도, 소리도 모든 게 새롭고 기이하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나니 고작 이동밖에 하지 않았을 뿐인데, 여행이 끝나도 될 것 같은 피로가 몰려왔다. 시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충분히 깨어 있었고, 충분히 소진된 몸으로 필름이 끊기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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